차가운 피가 흐르는 여자
이 여자의 영화는 건조하다. 이 여자의 눈매는 냉정하다. 이 여자의 유머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루크레시아 마르텔은 최근 최악의 경제적 여건에도 불구하고 상승세를 타고 있는 아르헨티나영화를 이끄는 실력있는 여성감독이다. 1966년생으로 35살에 데뷔한 이 늦깎이 여성감독은 대학에서 신문학을 전공하면서, 남는 시간으로 시나리오를 만드는 등 차근차근 감독의 길을 닦아왔다. 그녀에게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이 심한’ 아르헨티나 북부는 그녀가 창조한 세계의 중심에 해당하는 곳이다. 자신의 영화 모두의 배경이 되는 이 마을을 등 뒤로 하고, 그녀는 아르헨티나의 지배 계급인 백인 부르주아의 타락한 이면을 냉혈동물의 온도 감각으로 예리하게 짚어낸다. 물 웅덩이처럼 깊게 고여 있는 수영장에는 술에 절어 사는 어머니와 서로의 몸을 더듬는 형제 자매들의 성마르고 끈기없는 욕망이 켜켜이 침전해 있다. <늪>과 <성스런 소녀>, 이 두편의 영화는 루크레시아 마르텔이 자신이 속한 가족과 계급을 성찰하는 방식이며, 아르헨티나 사회를 비판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빌리지 보이스>의 평론가 에이미 토빈은 마르텔의 대부분의 영화가 그녀가 자신의 가족과 연관맺고 있는 어떤 기억과 관계에 의존해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과연 <늪>과 <성스런 소녀>의 가족들은 진정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일단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영화에서 집은 이미 제 기능을 상실한 공간이다. 늪의 배경이 되는 부유한 백인 부르주아의 저택은 말 그대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펄처럼 사람들의 원기를 빨아들인다. 심지어 <성스런 소녀>의 경우에는 아예 ‘집’과 연관된 이미지는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 주인공 아말리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머물다 떠나는 뜨내기 공간인 호텔에서 어머니와 함께 잠을 자고, 길거리에서 음악을 듣고, 학교에 가서 숨이 막힐 것 같은 제도 교육을 받는다. 인종 차별, 여성에 대한 억압, 빈부 격차. 아르헨티나가 빚어내는 모든 문제는 이 가정의 불화에 집약되어 주인공들은 작은 충격에도 조각조각날 것 같은 기묘한 파열음을 낸다. <늪>에서 마님 행세를 하는 여주인공은 하녀들이 수건을 훔쳤다고 닦달하며 심지어 바로 옆에서 전화가 울려도 하녀가 받게 한다. 사춘기가 시작된 아들은 숲속에서 움직이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총질을 해댄다. 폭력과 서로에 대한 무관심으로 파탄 직전인 <늪>의 주인공들처럼 <성스런 소녀>의 소녀들은 또래 친구를 빼놓고는 어느 누구와도 의사 소통이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길거리에서 자신의 엉덩이를 만진 중년 남성에게서 오히려 신의 손길을 느낀 소녀는 순결을 지키기 위해 남자친구와 ‘애널 섹스’를 하고 그녀의 엄마는 바로 그 중년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고 믿는다.
이 가운데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연출은 자로 잰 듯 정확하고 한치의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제도 교육을 벗어나 숲속을 뛰어다니는 소녀들을 클로즈업과 핸드헬드 등으로 서정적인 기운을 창조하다가도, 모차르트의 음악과 성추행범의 손이 함께 클로즈업되는 영화의 톤은 기묘하게 웃기고 차가우면서도 축축한 섬뜩한 느낌이 있다. 마르텔의 영화에서 어른들이 모두 사춘기 소년 소녀들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저명한 이비인후과 의사는 사실은 성추행범이고, 엄마는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안달복달한다. 차분하고 느린 카메라는 폭발 직전의 차가운 긴장으로 째깍거린다. <성스런 소녀>에서 영화는 결국에는 밝혀질 성추행의 전모가 드러나기 직전에 딱 멈추어 선다.
솔직히 칸에서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영화를 보았을 때, 그녀가 공간이나 소리를 잡아내는 솜씨를 보면서 페르난도 솔라나스에 이어 아르헨티나에 또다시 거장이 등장할 것이라는 설레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이미 첫 번째 작품인 <늪>으로 가장 탁월한 데뷔작에 돌아가는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했으며 두 번째 작품으로 단번에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오른 루크레시아 마르텔. 인복, 상복을 두루 갖춘 이 행운아에게 남미 최고의 여성 프로듀서 리타 스탠틱이 돈을 대고 있으며,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미래의 거장으로 이미 찬사를 바친 상태이다. 그러니 이 섬세한 원칙주의자인 여류감독이 적어도 아르헨티나를 경제적 위기에서 구할 수는 없어도 남미의 예술적인 파탄상태를 충분히 구할 만한 ‘성스런 감독’이 될 수 있지는 않을까? 진심으로 그녀의 세 번째 작품을 기다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