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거장 예감, 세계의 新星 감독 10인 [6] -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2004-10-01
글 : 문석
멕시코의 신성,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상실의 나락, 희망 연주자

2000년, 세계 영화계는 멕시코시티를 질주하는 자동차가 낸 굉음에 깜짝 놀라 한동안 잊고 있던 대륙을 향해 일제히 눈길을 돌렸다. 립스테인과 조도로프스키의 전통이 서려 있는 멕시코영화를 다시 주목하게 한 이 영화는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41)의 <아모레스 페로스>였다.

갑작스런 자동차 충돌사고를 축으로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목격자의 이야기를 교묘하게 얽어놓은 이 작품은 폭발적인 에너지와 MTV 스타일의 빠른 화면 전개, 세 사람의 시점을 교차시키는 내러티브 등으로 보는 이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각각의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개를 이용해 사람들과 세상을 비웃는 대목은 정치적으로 해석되기도 했다. “<아모레스…>는 새 세기의 첫 번째 고전으로 느껴진다”(<뉴욕타임스>) 등 평단의 찬사는 그해 칸영화제에서 비평가주간 대상으로 이어졌으며, 곳곳의 영화제는 두팔을 벌려 이 영화를 환영했다. 특히 멕시코뿐 아니라 미국, 유럽에서 거둔 대대적인 흥행 성적은 새로운 천재 감독의 탄생을 확증하는 듯했다.

하지만 얼마 뒤 그가 두 번째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만든다는 뉴스가 나오자 많은 이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이 영화가 돌발적인 사고에 얽힌 세 사람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소식이 뒤를 잇자 그는 제2의 로버트 로드리게즈, 또 다른 가이 리치로 간주됐다.

2003년 베니스영화제를 통해 공개된 <21그램>은, 그러나 이런 ‘기대’를 철저하게 외면했다. 한 남자와 두딸을 자동차로 쳐 사망케 한 잭(베니치오 델 토로), 희생자의 아내이자 어머니 크리스티나(나오미 왓츠), 크리스티나의 남편이 죽기 직전 남긴 심장을 이식받아 생명을 연장하게 된 폴(숀 펜), 이 셋의 이야기를 내세운 이 작품은 <아모레스…>와 비슷해 보이지만, 완전히 다른 영화다. 사건이 일어난 순서를 알 수 없게끔 뒤죽박죽 배치된 내러티브 속에서 그는 한없는 절망 속에 놓인 사람과 그 고통이 다른 사람에게로 전이되는 과정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시간순으로 사건을 배치하기보다 감정적으로 배열한다”는 그의 내러티브 실험은 단지 조각난 사건들을 끼워맞추는 얄팍한 퍼즐게임이 아니라 절망과 고통의 어둠 속을 함께 걷는 세 주인공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된다. <21그램>은 인간과 세상에 대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이해가 더욱 깊어졌고, 형식적으로도 한층 성장했다는 것을 입증했다.

<21그램>

<21그램>을 통해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벗어버린 굴레는 ‘할리우드로 투항한 또 하나의 변절자’라는 따가운 시선만이 아니었다. 3개의 에피소드가 꼬리를 무는 형식과 폭력적 성향, 빠른 화면전환 등을 품고 있는 <아모레스…> 때문에 쿠엔틴 타란티노의 세례를 받은 것으로 분류돼왔던 그는 두 번째 작품으로 이 지긋지긋한 ‘망령’을 떨쳐버렸다. 방송사 DJ로 활약했고, 광고 제작자와 TV드라마 연출자를 했던 전력과 2편에서 호흡을 맞췄던 시나리오 작가 기예르모 아리아가의 존재로 미뤄볼 때 그의 이름이 다시 타란티노 주변을 맴돌 일은 없어 보인다.

“인생은 매일 아침 6시에 주사위를 던지는 것과 비슷하다”는 지론처럼 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갑작스레 다가오는 외부로부터의 충격에 맨몸으로 노출돼 있다. 그가 아리아가와 준비하는 세 번째 영화 또한 갑작스런 사고를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가 이토록 같은 주제에 집착하는 데는 태어난 지 이틀밖에 안 되는 아들을 저 어둠 속으로 보냈던 스스로의 경험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아모레스…>를 아들에게, <21그램>을 그 고통을 함께 겪은 아내에게 헌정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그가 보여주는 것은 이런 세계의 불예측성만이 아니다. 오히려 ‘이 한없는 어둠 속에서 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끝이 보이지 않는 상실의 연속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따위의 존재적 실천이야말로 그의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나는 지적인 영화를 혐오한다. 차가운 예술을 싫어한다”는 곤잘레스 이냐리투가 <21그램> 말미의 자막에 “상실이 다 불타버리면 녹색 옥수수가 다시 자라리라”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적을 때, 그건 ‘뜨거운 영화’에 대한 열정 혹은 남미 특유의 낙관주의가 발동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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