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위성을 거부하는 도발
개인적 감회부터 시작하자. 난니 모레티의 <아들의 방>에 최고의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안기며 막을 내린 지난 2001년 제54회 칸영화제에서 본 40편가량의 영화들 중 내 뇌리에 가장 강력히 머물러 있는 건 아르헨티나가 낳은 미지의 신예가 쓰고 연출한 <자유>(La Libertad)라는 작품이다. 뭐 예의 걸작 내지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빼어나거나 내 취향에 완벽히 조응해서는 아니다. 그럼에도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선보인 영화는, 그간 극히 다양한 영화들을 적잖이 접해온 내게도 단연 주목할 만했다. 한마디로 그것은 특기할 만한 아무런 극적 사건도 벌어지지 않는 영화의 지독한 사례였다.
극저예산으로 만들어진 게 틀림없는 영화는 겨우 70분여 동안 미사엘이라는 한 사내의 하루 일과를 별 다른 인위적 포장이나 설명없이, 아주 느린 호흡으로 보여준다. 딱히 다큐멘터리라고도 극영화라고도 할 수 없을, 달리 말하면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지워버린 영화는 일체의 인간적 교류를 하지 않으며 숲속에서 홀로 사는 그가 먹고 일하고 거래하고, 심지어 배설하는 일상적 행위 따위를 묵묵히 묘사할 따름이다. 점잔 빼며 이른바 문명인의 눈으로 보자면, 그 행위를 지켜본다는 건 솔직히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바 인간의 삶이 아닌 야생 짐승의 삶인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여느 잘 빠진 영화들에서 좀처럼 맛보기 힘든, 묘한 긴장과 흥미, 나아가 흥분을 솟구치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약간의 과장을 덧붙인다면, 영화의 제목처럼 인간의 진정한 자유란 과연 무엇일까를 새삼 환기시키기까지 한다. 그 얼마나 지독한 역설이요 도발인가.
당시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그 감독이 다름 아닌 리산드로 알론소다. 서른살 문턱에 서 있는, 아르헨티나가 낳은 주목할 만한 신예감독. 그가 3년 만에 올 칸에 되돌아왔다. <죽은 사람들>(Los Muertos)- 올 부산영화제 크리틱스 초이스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이란 신작으로. 두 번째 만남이어서일까, 감독주간에서 선보인 영화는 전작에 비해 다소 순해진, 좀더 정확히 표현하면 덜 지독한 느낌으로 다가선다.
아르헨티노 바르가스라는 중년의 사내가 있다. 그는 이제 막 출옥해 카누를 타고 강을 따라 오래전 낳은 딸을 만나기 위한 여정을 펼친다. 그 과정이 역시 70여분간 진행되는 이야기의 거의 전부다. 영화 속 힌트에 의하면 그는 어릴 적 두 형제를 살해해 투옥되었는데, 그 이유는 결코 제시되지 않는다. 이미 짐작하겠지만 그는 끝내 딸을 만나지 못한다. 대신 손자(들)를 만나며 영화는 끝난다. 딸이란 존재는 결국 일종의 알리바이인 셈이다. 이쯤 되면 이 감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가 내러티브의 해체라고 해도 과장은 아닐 터. 하지만 그 정도 선에서 그친다면, 그를 미래의 거장으로 진단하는 건 평론가 특유의 호들갑이거나 과장이기 십상일 것이다. 게다가 그런 감독들이 어디 한둘인가. 근자엔 당장 이란영화의 숱한 작가들, 특히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를 비롯해 2000년대 타이에서 배출한 ‘앙팡 테리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등 그 예들은 수두룩하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해체할 뿐 아니라 일관되게 ‘가난의 영화’를 추구하는 모범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날로 살이 찌다 못해 비만의 지경에 다다른 영화 예술의 어떤 경향에 극심한 반감을 가지고 그 도도한 흐름에 역류하려는 반역자들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알론소 감독의 해체나 가난함이 훨씬 더 지독하다는 것이랄까. 그를 키아로스타미나 위라세타쿤 등과도 구별짓는 또 다른 특징은 그러나 다른 데에 있다. 두 감독의 연출이 극히 정교하고 치밀한 계산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의 연출에는 그 어떤 인위적, 예술적 꾸밈 즉 연출이 (거의)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들의 영화에 버금가는, 그와는 또 다른 감흥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예술은 일종의 인위적 가공 행위다. 알론소는 그 인위성을 배제한다. 그러면서도 그 어느 영화 예술가 못지않은 예술적 감흥을 만끽시켜준다. 서구 모 평자의 입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의 영화는 단언컨대 “급진적이고 본능적이며 비타협적”이다. 그 어느 감독보다 더. 선호 여부를 떠나 내가 이 감독을 미래의 거장으로 점치는 으뜸 이유다.
전찬일 / 영화평론가 jci196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