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숱한 DVD 타이틀이 시장에 선을 보이지만, 모든 타이틀이 고르게 주목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놓친 채로 지나간 타이틀 중에는 충분히 관심을 끌었어야 할 것들도 의외로 많은 법. 여기서는 두 가지 기준에 의거, 재발견의 가치가 있는 타이틀을 네 편 뽑아보았다. 첫 번째 기준은 팬들 사이에서 지명도가 있고, 작품 자체의 완성도도 높음에도 불구하고 DVD가 나왔을 때 기대 이하의 반응을 보였던 DVD, 또 하나의 기준은 다른 주력 타이틀에 밀려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던 DVD다.
<트윈픽스> 시즌 1 (파라마운트)
1990년 4월부터 2년간 ABC TV를 통해 방영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트윈픽스>는 10년이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는 문자 그대로 TV 극의 ‘전설’이 되었다. 이른 바 ‘쿼키(Quirky) 쇼' - 훗날 <엑스 파일>로 명맥이 이어지는 - 의 원조라 할만한 이 시리즈는 이 시대 최고의 아방가르드 예술가 데이빗 린치의 상상력과 베테랑 TV 작가 마크 프로스트의 역량의 격렬한 화학반응이 빚은 특별한 산물이다.
범죄 미스터리극과 소프 오페라, 초자연적 스릴러, 부조리 코미디, 틴에이지 멜로드라마의 요소를 모두 갖추었으면서도 그 어느 장르에도 속하지 않는 이 기괴한 TV 극은 아쉽게도 두 시즌 만에 막을 내리고 말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이 시리즈를 더욱 신비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어떤 TV극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트윈픽스>만의 컬트성과 신비성은 DVD의 소장가치를 측정 불능치로 높여 주었다. 특히 시리즈의 모든 에피소드가 재음미 할 때마다 새로이 해석되는 ‘열린 텍스트’ 라는 점과 몇 번을 보아도 지루하지 않을 정도의 중독성을 지녔다는 점에서 <트윈픽스>는 영구 소장용 기록 매체인 DVD의 소스로는 그야말로 ‘딱’이다.
그러나 이런 ‘작품적 측면’ 외에도 <트윈픽스>의 DVD가 ‘특별 대접’을 받아야 할 이유가 또 있다. 지난 2001년 출시된(한국은 2002년 출시) <트윈픽스> 시즌 1 DVD는 HBO의 ‘블록버스터급’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와 더불어 TV 드라마 DVD 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타이틀 자체의 완성도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트윈픽스> 시즌 1 DVD는 북미 최대의 인디펜던트 DVD 제작사인 아티잔(ARTISAN)이 거액을 투자해 기획/제작한 야심작으로 제작 기간만 해도 보통 TV 극의 몇 배에 달했다. 트랜스퍼의 결과도 탁월해 지금까지도 화질 면에서 대적할만한 공중파 드라마가 없을 정도다. (물론 HBO의 ‘괴물급’ 드라마들은 예외로 하고!) 게다가 TV 극으로는 이례적으로 깔끔하게 다듬어진 5.1채널 DTS 트랙을 수록한 바 있는데, <트윈픽스>가 청각적 요소가 특히 강조되는 ‘소리’의 영화라는 점에서 이 부분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쉽게도 파라마운트에서 발매된 국내판(소스는 아티잔 판과 동일하다)에서는 DTS 트랙이 빠졌지만, 대신 여기에는 아티잔의 발매판이 판권 문제로 수록하지 못했던 ‘파일롯’ 에피소드가 수록되었다는 강점이 있다. (파일롯 에피소드의 화질과 음질이 다른 에피소드보다 떨어지는 것은 소스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빼어난 AV 퀄리티 외에도 이 타이틀에는 음성해설과 스크립트 노트 등의 아기자기한 서플먼트들이 포함되어 있어 이것을 감상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물론 데이빗 린치의 음성해설이 빠진 것은 못내 아쉽지만 말이다. (데이빗 린치는 스필버그와 더불어 DVD의 음성해설에 절대 참여하지 않는 감독으로 ‘악명’이 자자하니 이건 앞으로도 기대하지 마시길) 올해 9월에는 아티잔으로부터 판권을 넘겨받은 파라마운트가 드디어 시즌 2를 출시하니 기대하시라. (김정대)
<소프라노스> 시즌 1,2 (워너 브라더스)
어느 순간부터인가 HBO의 드라마들은 줄줄이 ‘명품’소리를 듣게 되었다. 빼어난 작품성과 오락성은 기본이요, 여기에 심의로부터 비교적 자유롭다는 케이블 TV용 드라마 고유의 장점을 120% 살린 ‘잔인하고 화끈한’ 장면들까지 갖추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HBO의 간판 드라마인 <소프라노스>는 이런 특성을 지닌 케이블 TV용 드라마의 롤 모델이라 할 수 있다. 현대 드라미디('Dramedy', 드라마와 코미디의 합성어)극의 결정판이라 할 만한 <소프라노스>는 매 시즌 케이블 TV의 최고 시청률 기록을 경신하며 계속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작년에 방송된 시즌 4의 첫 에피소드의 경우는 무려 1천 3백만 명의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운집시켰는데, 이것은 케이블 TV 드라마 사상 초유의 기록이었다.
이 드라마가 이토록 폭발적인 인기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소재적 측면에서 이 드라마는 미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갱단과 마피아’에 대한 환상을 직접적으로 자극한다. 그러나 이 드라마가 성별과 나이를 초월해 사랑을 받는 진짜 이유는 바로 이 소재를 다루는 특별한 방식 때문이다. 토니 소프라노가 이끄는 마피아 패밀리는 겉으로는 <대부> 식의 근사한 마피아 집단인 척 하지만 실은 그것을 닮으려고 끊임없이 발버둥치는 ‘약간 모자란’ 보통 사람들일 뿐이다. 이들의 고민거리는 평범한 시민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 자식 문제, 돈 문제, 부부 관계, 부모와의 갈등 등 - 결국 이 드라마는 소프 오페라의 전통적 소재인 ‘가족애’를 미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장르 양식을 통해 뒤틀어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묘미는 청춘 시트콤처럼 가볍지도, 심각한 휴먼드라마처럼 무겁지도 않은 극의 독특한 분위기이다. 코미디로 보기엔 너무 진지하고 드라마로 보기에는 살벌하게(?) 웃기다. 이는 <소프라노스>만이 전달할 수 있는 특별한 감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기록적인 시청률과는 별개로 이 드라마는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근래 나온 드라마 중 최고작’이라는 찬사를 받아 왔는데, 여기에는 최고 수준의 각본과 제임스 갠돌피니를 비롯한 출연진이 선보인 놀라운 연기력 및 에피소드 각 편의 빼어난 완성도(이 드라마는 에피소드 한 편 한 편이 완결된 영화의 형식을 띠고 있다)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HBO의 드라마들은 호화 스펙의 DVD로 발매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소프라노스>도 예외는 아니다. TV 드라마답지 않게 1.85:1 와이드스크린 아나몰픽과 5.1채널(돌비디지털) 포맷을 완벽하게 지원하며 비하인드 씬과 영화 소개 피쳐렛 등 서플먼트도 좋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국내 출시판 시즌 1의 경우에는 5.1채널 사운드트랙이 빠졌으며 서플먼트 중 가장 중요한 데이빗 체이스 - 시리즈의 실질적 창조자 - 와의 인터뷰 서플먼트(77분 분량)도 누락된 채 출시된 바 있다. 대히트 드라마에 어울리지 않는 판매실적보다 더 아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김정대)
<늪 - MBC 베스트 극장> (비트윈)
텔레비전만 틀면 불륜 천지다. 오죽하면 아침 드라마에서조차 불륜을 심각하게 다루고 있을까? 이처럼 외도를 하는 경우 한 쪽이 큰 상처를 받기 마련이다. 이는 혼자 분을 삭이며 상대방을 용서하거나, 혹은 이를 갈며 처절한 복수를 하는 것으로 갈린다.
MBC 베스트셀러 극장을 통해 방영이 된 <늪>은 후자에 속한다. 이 드라마는 남편의 외도로 철저하게 기만을 당한 아내의 복수의 과정을 그리지만, 기존 드라마와는 차별되는 몇 가지 특징을 지녔다. 드라마로서는 복수의 강도가 상당히 센편이며, 등장 인물들의 복잡한 심리적 묘사가 뛰어나다. 또한 이야기의 짜임새와 복수를 행하는 과정이 치밀해 기존 드라마의 한계를 넘어선다.
<늪>은 디지털 방송의 방향 모색에 중점을 둔 HD 촬영과, 돌비 디지털 5.1 채널로 제작을 하면서 많은 주목을 모은 드라마이다. DVD 타이틀이 그 만큼의 고화질을 보여주진 않지만, 일반적인 TV 방송을 통해 만나는 드라마보다는 좋은 화질임은 틀림없다. 스페셜 피처로는 37분에 이르는 메이킹 필름, NG 장면, 프로덕션 노트, 예고편을 제공한다. 매우 평범한 구성이지만 7일간의 드라마 제작 과정을 담은 메이킹 필름이 볼만하다. 불륜 소재의 드라마를 좋아한다면 절대 놓치지 말 것! (김종철)
<십계 - 데칼로그> (인피니티)
여기서의 <십계>는 찰턴 헤스턴이 나와 홍해를 가르는 종교영화가 아니라, 폴란드의 거장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만든 10부작 TV 시리즈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몇 년 전 EBS를 통해 전편이 방영된 바 있다.
기본적으로는 십계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지만, 종교적 색채 보다는 현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를 묻는 철학적 성격이 강조되었다. 깊이 있는 내용과 연출을 통해 드라마의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10부 중 5, 6부가 각각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이라는 장편으로 나와 있기도 하다.
박스 세트로 발매된 DVD는 TV 시리즈 전편과 함께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이 직접 출연한 다큐멘터리
와 충실한 해설서가 포함되어 있다. 키에슬로프스키 팬이라면 놓치지 말 것. (김송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