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TV 시리즈 DVD 특집 (7) - 한국 드라마 어디까지 왔나
2005-03-26
글 : 강명석 (기획위원)

불과 몇 년 전에 누군가가 취미를 ‘드라마보기’라고 한다면 무척 한심한 사람취급 받았다. 음악이나 영화감상은 취미가 될 수 있어도 드라마엔 ‘감상’이란 단어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그래서 드라마는 늘 드라마에서조차도 ‘할 일없는 주부들의 유일한 소일거리’(주부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쯤으로 인식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특히 영화 <해피엔드>같은 작품이 증명하듯, 다 큰 남자가 드라마를 본다는 것은 좋게 말하면 섬세한 남자, 나쁘게 말하면 남성성을 포기한 남자처럼 묘사됐다. 아무리 집에서 드라마 편성표를 줄줄 꿰고 있더라도 밖에서는 말하지 말 것.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드라마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 그 남자 그 여자들은 자신들이 당당히 드라마폐인임을 자부할 수 있다. 요즘 드라마를 보지 않으면 시대에 뒤처진다. 당장 일본의 한류열풍을 일으킨 것이 <겨울연가>고, 좀 생겼다 싶은 가수들은 모두 연기자 겸업을 선언하며, 인터넷에는 셀 수 없이 많은 드라마 팬들이 존재한다. 과거에 어떤 가수가 음반 백만 장 팔았다는 이야기가 기삿거리가 됐듯, 요즘에는 드라마 시청률이 얼마 나왔다는 것이 기사가 된다. 이제 드라마가 시작하면 ‘**폐인’, ‘**철인’이 생기는 것은 뉴스거리도 아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물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한류 붐이 일어서 드라마가 돈이 되니까, 방송사에서 드라마에 점점 더 사활을 거니까, 외주제작이 자리 잡으면서 그만큼 드라마 기획과 마케팅의 수준이 높아지니까 등등.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드라마가 지금의 시청자들, 특히 젊은이들의 트랜드를 선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하게 말하면, 몇 해 전 유행어를 만들어내는 곳은 영화였다. 하지만 요즘 유행어는 TV 드라마에서 나온다. 물론 영화관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만, 현재의 영화는 보다 넓은 층의 관객을 노리면서 한 가지 뚜렷한 흐름의 작품들보다는 다양한 스타일과 이야기의 작품들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반대로 가능하면 젊은이들의 기호에 맞춘 드라마를 방영하려 한다. 그래서 영화관에서 젊은이들의 로맨틱코미디는 그다지 큰 영향력이 없지만, 드라마에서 KBS <쾌걸춘향>같은 로맨틱코미디는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다.

이것은 한국 드라마업계가 원래 가지고 있던 잠재력이 시장의 변화와 맞물리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이제 말하기도 지겨울 정도지만, 한국 드라마업계는 매우 비정상적인 시장이다. 방송시장이 일정수준의 규모를 가지고 있는 나라에서, 이토록 소수의 공중파 방송사가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고, 더불어 그 방송사가 앞장서서 드라마 제작을 장려하는 나라는 없다. 만약 마음먹고자 한다면 시청자들은 드라마를 케이블이 아닌 공중파에서 거의 하루 종일 볼 수 있다. 아침 드라마, 오전시간의 재방송, 저녁의 시트콤들, 그리고 프라임타임대의 드라마까지, 거의 한 시간 걸러서 한번쯤은 볼 수 있는 게 드라마다.

그러다보니 역으로 드라마를 제작할 시간이 부족해서 날림 작품들이 나오는 경우도 많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드라마 중심의 편성은 드라마 업계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들의 능력을 숙련시켰다. 한국이 아니었다면 김병욱 PD의 <순풍 산부인과>나 <똑바로 살아라>처럼 가히 ‘작가주의 시트콤’이라고 불릴만한 작품들이 매일 방송되거나, <네 멋대로 해라>와 <아일랜드>이전의 인정옥 작가가 그토록 수많은 단막극과 미니시리즈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지도 못했을 것이며, 노희경 작가는 ’거짓말‘에서 이미 퇴출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인터넷의 등장은 드라마의 흐름을 그전과 매우 다른 쪽으로 끌고 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전까지 드라마의 반응에 대한 모든 기준은 시청률이었다.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가 곧 인기 드라마였고, 현재 시청률이 높은 장르의 드라마들이 앞으로 만들어야할 드라마이기도 했다.

물론 이는 지금도 사실이다. 하지만 인터넷상의 반응은 과연 시청률만이 인기의 척도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했다. 젊은층이 많은 인터넷에서는 시청률과는 크게 다른 반응을 보이는 드라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그 드라마에 대한 반응들은 때로 놀라울 정도로 컸다. 이후 <네 멋대로 해라>와 <다모>가 증명하듯, 그리 높지 않은 시청률로도 인터넷상에서는 폭발적인 반응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광고시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20-30대의 소비층이 좋아하는 드라마가 따로 있음을 알려주었고, 그들의 드라마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은 음악과 영화 이상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리고 인터넷으로 촉발된 각종 커뮤니티는 드라마의 재방송에 대한 수요를 높여주었고, 이는 케이블 TV뿐만 아니라 인터넷을 통한 다시보기, 그리고 DVD 수요까지 동시에 높였다. 사람들이 보기만하는 시청률 40%의 드라마대신 열광적인 팬들이 다시보기로 몇 번씩 드라마를 다시 보는 작품들이 수익측면에서 더 나을 수도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게다가 인터넷은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전달되던 시청자의 반응을 구체적인 것으로 바꿔주었다. 과거에는 방송사가 자신들의 입맛에 따라 드라마를 어떻게 바꾸든 간에 시청자의 반응은 언론매체를 통해 정제된 상태로 전달됐고, 시청자들의 구체적인 반응은 시청률의 논리에 밀려 묻히곤 했다. 그러나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시청자들의 의견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가게 되었고, 이에 따라 드라마들은 이전과 달리 각 회별로 매우 민감한 피드백을 받게 되었다. SBS <파리의 연인>이나 최근의 <봄날>이 증명하듯, 요즘에는 초반에 높은 시청률로 시작한 드라마도 몇 회 삐끗하기만 해도 시청률이 급격하게 떨어진다. 인터넷의 빠른 피드백이 그대로 언론매체에 전달되고, 이를 통해 대중들이 매회의 결과에 따라 드라마를 보고 안 보게 되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인터넷이 본격적으로 드라마 커뮤니티를 지배한 2000년대부터, 국내 드라마는 변화의 필요성이 서서히 대두되기 시작되었다. 시장이 커지고, 시청자에 대한 보다 정확한 분석이 가능해지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드라마를 만들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해결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의 드라마가 기존 드라마의 문법을 벗어나기 시작하면서 가능해졌다. 그동안 한국의 드라마는 미니시리즈에서도 ‘연속극’의 개념으로 움직였고, 권선징악과 삼각관계, 그리고 가족이 장르적인 클리셰처럼 사용되었다. 즉, 드라마는 최소 16회가 넘는 내용 속에서 하나의 큰 스토리를 가지고 움직이고, 갈등의 중심에는 가족과 삼각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MBC <네 멋대로 해라>가 등장하면서 이런 드라마의 방향은 크게 바뀌기 시작한다. <네멋대로 해라>는 기존의 스토리 위주의 드라마를 ‘별난 캐릭터’ 중심으로 바꾸었다. 비록 삼각관계나 불치병 같은 요소들이 모두 등장하기는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런 설정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전형적인 결말을 비껴나갔고, 대신 작품이 주목한 것은 상처받은 캐릭터들이 어떻게 다시 새로운 관계를 맺고, 한명의 생활인으로 자립하느냐의 문제였다. 과거에는 드라마는 뻔히 길이 보이는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잔재미를 느끼다가 마지막에 몇 번 울어주면 될 뿐이었다(물론 예외적인 작품들도 있었다). 그래서 드라마는 별 볼일없었다. 하지만 <네 멋대로 해라>이후 드라마는 갑자기 영화를 능가하는 명대사들이 줄줄 쏟아져 나오게 되었고, 주제는 깊어졌으며, 그것을 전달하는 방법은 난해해졌다.

다시 말해, 드라마가 ‘쿨’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쿨해진 드라마에 젊은이들은 거의 폐인처럼 빠져들기 시작했고, 이는 드라마로서는 기록적인 DVD 판매량과 아직까지도 이어지는 인터넷 커뮤니티로 증명되었다. 이후 드라마들은 경쟁적으로 새로운 무엇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다시 말해 거의 모든 드라마들에 젊은이들과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트랜드가 반영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했다. MBC <다모>는 그것을 드라마에서는 결코 불가능할 것 같았던 블록버스터급 액션영화로 만들면서 시청자들이 얼마나 드라마 속에서 ‘스케일’과 ‘제대로 된 비극’을 원하는지 증명했고, SBS <발리에서 생긴 일>은 지금까지 뻔하게만 진행되었던 재벌 2세와 별 볼일 없는 여자와의 사랑을 신데렐라로 만드는 대신 잔혹한 살인극으로 끝내버리며 드라마에서 동화의 시대를 종료했으며, MBC '대장금’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도 얼마든지 패셔너블한 분위기가 풍겨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1년뒤, 인정옥 작가는 <아일랜드>로 모든 회가 수수께끼 같은 드라마를 공중파에서 방송했고, MBC '12월의 열대야‘는 한국의 기혼 여성의 삶을 웃음과 눈물이 범벅된 ’비극‘으로 담아냈다.

그리고 이것은 드라마가 시대의 감수성을 포착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그동안 ‘묵혀있던’ 장르의 모습을 새롭게 일신한 드라마들은 점점 더 특정 세대의 감수성에 세분화된 작품들을 내놓으면서 점점 전문화되고, 그만큼 영화와는 또 다른 재미를 주기 시작했다. <낭랑 18세> <백설 공주> <쾌걸춘향> <열여덟 스물아홉>등으로 이어지는 KBS2의 밤 10시대 드라마들은 명백히 인터넷 소설의 감수성을 받아들인 것이고, KBS <해신>은 사극에 현대적인 멜로드라마를 결합했다.

이런 드라마의 흐름은 마치 영화처럼, 시청자들에게 드라마를 평가하는 기준을 매우 세분화시키도록 만들었다. 과거에는 스타 파워와 빠른 전개만으로도 시청률을 보장받았다. 하지만 요즘에는 고현정이나 이효리가 출연해도 아무것도 보장하지 못한다. 오히려 시청률을 보장하는 것은 얼마나 매회 재미있게 드라마를 끌고 가느냐는 것이다. KBS <쾌걸춘향>은 이렇다할 톱스타나 특별한 이슈도 없었고, 부분적으로는 매우 유치한 스토리를 전개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쾌걸춘향>은 인터넷 소설의 감수성을 그대로 이어받아 로맨틱 코미디와 연예계, 그리고 연애심리의 요소를 혼합해 예상외의 반응을 얻어낼 수 있었다. 자신들의 취향을 세밀하게 맞추는 작품이라면 얼마든지 열광하지만, 과거처럼 몇 가지 요소들만 끌어온 드라마에는 철저한 외면으로 답하는 것이다. 드라마역시 영화처럼 어떤 흥행요소보다 시대의 트랜드에 어울리는 ’작품‘이 중요한 요소로 인정받고, 스토리뿐만 아니라 영상과 표현방식 모두에서 인정받는 시기가 온 것이다.

대중화와 트랜드의 갈림길

물론 지금의 드라마가 누리는 위치가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알 수 없다. 드라마 붐이 불기전이나 지금이나, 한국의 드라마는 여전히 쪽대본과 철야 촬영이 반복되고 있고, 비록 스토리의 전개와 캐릭터는 바뀌었을지라도 불치병 - 삼각관계 - 출생의 비밀 등은 여전히 드라마에서 자주 쓰이는 소재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의 드라마들은 그 소비자들인 시청자들과 그 어떤 장르보다도 밀접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고, 그것이 드라마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드라마들은 사전제작제가 이루어지지 않기에 다른 어느 장르보다도 시청자의 의사에 따라 작품의 방향을 바꾸어나가는 장르고, 이는 작품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문제가 되지만 반대로 시청자들에게는 드라마를 자신이 가장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대중문화 장르로 만들었다.

감독판 DVD로 나올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래서 그들은 끊임없이 드라마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만의 재미를 찾으며, 자신이 생각하는 드라마의 이상적인 방향에 모든 것을 건다. KBS <미안하다 사랑한다>가 팬들의 항의로 인해 결국 감독판 DVD를 발매하게 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이제 드라마는 자신들이 쌓아놓은 자산위에서 영화와 또 다른 방법, 바로 몇 달, 심지어는 몇 주에 이르는 젊은이들의 의식을 반영하면서 자신만의 위치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 영화처럼 점점 트랜드와 폭넓은 연령층을 모두 가져가는 범 대중화의 길로 나아갈지, 아니면 젊은이들의 또 다른 트랜드로 끝날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말이다.

드라마 DVD BEST 4 + Wish Title 1

네 멋대로 해라 : 드라마 DVD 시장이 분명히 존재함을 보여준 작품. 드라마 DVD 시장의 초창기에 나온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네멋 폐인’들의 열화와 같은 요청에 힘입어 질과 양면에서 모두 충실한 DVD가 되었다. TV 방영당시 공개되지 않았던 씬들이 매회 10여분씩 추가되었을 뿐만 아니라 팬들의 ‘네 멋 여행’을 비롯한 알찬 스페셜피처가 함께 담겨 있어 드라마 업계사상 최초로 소장가치가 있는 타이틀이라는 평을 들었다.

발리에서 생긴 일 : 위의 두 작품과 달리 새로운 편집이나 스페셜 피처는 없다. 그러나 무서운 것은 이 드라마를 DVD로 처음부터 끝까지 봤을 때 생기는 알 수 없는 중독성이다. 처음에는 가벼운 트랜디물처럼 시작했다가 점점 더 비극으로 치닫는 이 드라마는 보는 사람까지 등장인물의 심리에 빨려들도록 만든다.

다모 : 방영당시부터 HD로 방송, DVD에 대해 많은 기대를 품게 만들었던 타이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새로운 편집을 비롯, 영상과 사운드에서 모두 새로운 보정 작업을 통해 국내 드라마사상 최초로 5.1채널 사운드의 DVD로 탄생했다. 촬영 현장 및 DVD 제작과정, 드라마 코멘터리 등의 스페셜 피처도 볼만하다. 무엇보다 '다모폐인'의 열성적인 참여로 좋은 DVD 타이틀이 나올 수 있었다.

순풍산부인과 : 일년에 고작(?) 스무 편 남짓한 에피소드를 봐야하는 미국인의 입자에서 하루에 한편씩 시트콤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시트콤이 하루에 하나씩 방송되는 것이다. 그리고 ‘순풍산부인과’는 무려 3년 가깝게 1주 5회의 방송을 하며 시트콤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었다.

노희경 작품집 : ‘꽃보다 아름다워’의 완숙한 노희경도 좋지만, ‘거짓말’과 ‘바보 같은 사랑’에서의 노희경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사랑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주진모와 김갑수가 주연한 ‘슬픈 사랑’까지 끼어주면 더 좋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