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이 적다고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상실의 시대를 그리는 두 남자가 만났다. 제10회 부산영화제가 중반을 향해가던 10월9일 아침, 두 번째 작품 <러브토크>를 들고 부산을 찾은 이윤기 감독과 <흔들리는 구름>으로 언제나처럼 부산에 머무르고 있는 차이밍량 감독이 한자리에 모였다. 고독한 인간의 생채기를 포착할 만큼 섬세한 눈의 소유자라는 공통점 외에, 그들은 또 어떤 공통점을 지니고 있을까. 무엇에 아파하고, 무엇에 기뻐하고, 무엇에 슬퍼하며, 카메라 뒤의 고독을 무심히 즐기고 있을까. 대담은 아시아라는 땅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했고, 영화를 향한 애정의 고백으로 막을 내렸다. 서울과 타이베이의 공기를 동시에 머금고 있는 이른 아침의 대담을 여기에 싣는다. 길지 않은 이야기가 끝난 뒤 “궁금하지만 물어보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다”며 아쉬움을 토로하는 이윤기 감독에게 차이밍량은 따스한 포옹을 전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우리, 다음에 꼭 다시 만나자. 더 많은 이야기를 하자.”
이윤기/ <청소년 나타>로부터 <흔들리는 구름>까지, 일관적으로 말하려고 하는 주제가 너무도 또렷하다. 그게 대만사회에만 해당되는 주제는 아니겠지만, 주로 감독님 영화를 통해 대만을 접하다보니 대만인이 한국인보다 더 고독해 보인다. 대만사회가 사람을 고독하게 만드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차이밍량/ 대만 사람들은 유행하는 음식이나 유행가 등 짧고 빠르게 변화하는 것에만 열중한다. 언론도 희극처럼 변해가고 있다. 특히 지난 10년 동안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옳고 그름의 판단이 힘들어졌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이다. 사람들은 서로를 더이상 믿지 않는다. 서울과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그 때문에 더욱 타이베이의 고독이 깊어지는 것 같다.
이윤기/ 그렇다면 감독님의 타이베이는 내가 생각하는 서울과 똑같다.
차이밍량/ 사실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PIFF의 여러 행사에 참여하면서, 젊은이들이 연예인을 보고 소리치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젊은이들도 점점 방향감각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전 젊은이들이 자신만의 꿈을 지니고 살았다면, 지금 젊은이들은 연예인의 손을 잡고 싶다는 꿈을 지니고 산다. 이전 사람들이 예수나 석가모니 등 종교와 인간에 대해 고민했다면, 지금 아이들은 연예인의 생활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살아간다. 정신적인 공허함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흔들리는 구름>은 관객을 위한 영화처럼 느껴진다
이윤기/ 대만 감독들은 사회적인 분위기와 움직임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한다. 한국은 영화산업이 급격히 상승 중이지만, 사회와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그저 분위기만 한없이 업(UP)되어가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그런 분위기를 감독님도 알고 있을 테고. 그래서 유독 대만 감독들이 지성적인 분위기로 영화를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데. 혹시 내가 감독님과 허우샤오시엔 감독님 등 몇몇 분들의 영화만 알고 있기 때문은 아닌지 궁금하다.
차이밍량/ 어제 파티에서 만난 어느 영국 기자가 그러더라. 한국영화가 최고고 대만영화는 점점 하락하고 있다고.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대만영화는 지금도 최고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지금 전세계적으로 한국영화가 유명해지고 있는 게 사실인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가 뭐냐고 반문하더라. (웃음) 물론 대만의 영화산업은 열악하다. 유명배우도 적고, 제작사도 발달되어 있지 않고, 배급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오히려 대만 감독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창조적인 이야기를 해낸다. 특히 다큐부문이 그러하다(2004년 대만의 박스오피스 1위는 타이베이 지진에 관한 다큐멘터리였고, 올해 부산영화제에 초청된 <점프 보이즈>는 연말 박스오피스 5위 안에 들었다- 편집자). 내가 보기에, 한국 정부는 영화산업에 전격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지만 경제적인 면에만 치중하고 있어서 영화가 관객의 구미를 지나치게 맞추려 든다.
이윤기/ 그 영국 기자는 매우 우매한 사람이 아닌가 싶다. 각 나라의 영화에 우위를 매긴다는 것은 정말 잘못된 일이다. 한국영화의 성공은 산업적인 부분에 치중되어 있다. 80, 90년대의 대만영화들은 환상적이었다. 분명히 대만영화의 르네상스라는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 지금도 대만영화가 한국영화보다 떨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특히 <흔들리는 구름>은. 이 영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베를린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오늘 하루는 다른 영화를 볼 필요가 없다’고 하고 다녔다. (웃음)
차이밍량/ 고맙다. (웃음) 사람들이 영화를 너무 비즈니스적으로만 보고 있다. 영화는 하나의 창조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옳다. 국가별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산영화제가 가장 감동적인 이유 중 하나는, 대만영화를 여전히 귀중하게 대해주기 때문이다. 다녀본 다른 영화제에서의 일반적인 관객의 반응은 그 영국 기자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대만영화가 관객을 못 끌어들이기 때문에 무시당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관객이 들지 않는다고 해서 감독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관객이 할리우드영화에 익숙해지는 것을 직시하자. 나는 100여개 학교를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하고 표를 팔고 영화의 중요성에 대해 역설한다. 그래서 <흔들리는 구름>은 대만에서 흥행성적이 좀 좋은 편이었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표를 내밀어서 관객이 ‘한번 볼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 만큼의 고민과 행동이 필요하다. <흔들리는 구름>에 모두 13만의 관객이 들었는데, 7만명 정도는 야하다는 소문을 듣고온 사람들이겠지만, 그중에서도 5천명 정도의 새로운 관객은 건졌을 거다. 이처럼 감독 스스로 관객을 ‘배양’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윤기/ 지금 이야기는 참 희망적으로 들린다. 상황은 비관적이지만 방법은 얼마든지 있는 듯하다는 희망 말이다.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는게 참 좋은 거 아닐까. <흔들리는 구름>에서도 그런 열정과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 아니, 희망의 정도가 폭발적으로 느껴진다.
차이밍량/ (한국말로) 감사합니다.
이윤기/ (웃음) 그 말대로라면 감독님은 여전히 관객을 위해 영화를 만들고 있는 거다. ‘이건 예술영화야!’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꼭 상업적인 관객은 아니다’ 정도로 생각하는 듯하다. 사실 <흔들리는 구름>도 관객을 위한 영화처럼 느껴졌다.
차이밍량/ 영화 한편을 찍을 때마다 관객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다. 예컨대, 나는 옛날 영화들을 더 좋아한다. 핳리우드에서도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가 없던 옛날이 그립다. 그런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술영화가 관객을 만날 기회를 점점 잃어가는 현실이 안타깝지 않나. 지금처럼 예술영화가 변방으로 자꾸만 몰리는 상황을 감독들이 변화시켜야만 한다.
제작비는 문제가 아니다
이윤기/ <흔들리는 구름>을 보면서, 이런 영화를 만들려면 제작비는 얼마나 드는지, 시나리오는 어떻게 쓰여졌는지가 궁금해졌다. 대만에서 영화를 만들 때 평균제작비는 어느 정도이며, 제작기간은 어느 정도인지.
차이밍량/ 일반적으로 대만에서 영화를 만들 때 30만∼50만달러 정도의 제작비가 든다. 40만달러면 좋은 조건이다. 내 경우에는 외국에서 자본을 끌어올 수 있어서 80만∼100만달러 정도의 제작비를 쓸 수 있다. 150만달러로 영화를 만든 적도 있었고. 제작기간은 보통 두달 정도. 내 경우에는 반년 정도 걸린다. 젊은 감독들의 영화는 국가에서 1/3 정도의 제작비를 지원받기도 한다.
이윤기/ 나도 영진위의 지원을 받아 첫 영화 <여자, 정혜>를 만들었다. 그런데, 예전에 어떤 필리핀 감독에게 한국 평균제작비의 1/5로 <여자, 정혜>를 만들었다고 설명하면서 제작비를 밝혔더니 깜짝 놀라더라. 제작비가 너무 많다고. (웃음)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제작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있었지만, 이제는 내 영화의 제작비도 적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감독님은 대만에서도 명성이 좀 있는 분이니까 분명히 다른 루트가 있을 테지만, 다른 대만 감독들은 사실상 더 힘든 상황을 겪고 있는 게 아닌가.
차이밍량/ 자금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다. 자금이 적기 때문에 더 많은 창조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예술환경을 두고 나라끼리 비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지난번에 중국에서 온 기자를 만난 적이 있다. 대만 정부가 <흔들리는 구름>을 오스카 외국어영화상 후보 지명을 위한 출품작으로 선정해서 좋겠다고 하더라. 나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다. 오스카는 미국의 축제일 뿐이다. 오스카 같은 축제도 존중은 해야 하지만 거기에 의지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모든 국가들이 너도 나도 오스카 외국어영화상 후보에 오르고 싶어하는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는다. 이런 상황 때문에 관객 또한 영화를 편향적으로 보는 것이다.
이윤기/ 그래도 <흔들리는 구름>은 꼭 보내셔야 할 것 같은데. (웃음)
차이밍량/ 미국에 보내지 않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뭐, 이전에 뉴욕영화제에 출품했는데 선정되지 않았던 일도 있고. <흔들리는 구름>은 칸에 보냈으나 탈락해서 베를린에 갔고. 이러니 영화제가 내 영화를 받아들일지 아닐지는 나야 모르는 거다. 나로서는 그냥 영화만 잘 만들고, 만들어진 영화를 통해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중요하다.
영화는 시나리오도, 연기도 아닌 언어다
이윤기/ <흔들리는 구름>을 베를린영화제에서 보고난 뒤, 솔직히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독님이 도시인의 상실이나 고독을 표현하는 방식은 전세계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모던한 방식이다. 게다가 비슷하게 보이더라도 항상 다른 이야기를 하신다.
차이밍량/ 영화는 특수한 언어다. 나는 가끔 아르헨티나나 브라질의 영화제에 무작정 찾아간다. 그리고 자막이 없는 영화들을 그냥 앉아서 보곤 한다. 좋은 영화면 말을 이해하지 못해도 감이 딱 온다. 그런 식으로 영화를 구상하고 영화를 통해서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비슷한 예로서, 나는 무성영화와 표현주의영화를 여전히 사랑한다.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대체 내가 왜 영화를 찍을까, 라는 고민도 같이 하게 된다.
이윤기/ 이야기, 시나리오는 어떤 방식으로 쓰는 건가.
차이밍량/ 나에게는 원체 시나리오를 준비하는 시간이 힘들다. 게다가 완벽한 시나리오를 들고 촬영에 들어가본 적도 없다. 영화는 시나리오가 아니고 연기도 아니니까.
이윤기/ 마치 선생이나 구도자를 만난 듯한 기분이다. 한국에서 90년대에 영화를 공부한 사람들 중 감독님으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드물 거다. 게다가 영화가 점점 멋있어진다.
차이밍량/ 그렇게 말씀해주니 진심으로 기쁘다. 솔직히, 영화를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말하건대, 나는 영화 만드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나에게 영화를 만드는 일은 고통이다. 하지만 사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영화를 계속 해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사회주의자가 되어가는 것 같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