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 신작 프로젝트 [9] - 변영주 감독의 <피크닉>
2001-08-03
글 : 김혜리
사진 : 정진환
그녀의 삶을 살다

<피크닉>이 시작된 것은 지난해 봄의 일이었다. <숨결>을 매듭지은 변영주 감독은 영상원 강의가 같은 요일에 있던 오기민 프로듀서- 두 사람은 1990년 노동자 문화예술 운동연합(노문연)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와 마주쳐 쉬는 시간을 같이 보내고 있었다. 그날 오 PD가 주머니에서 구슬 쏟아내듯 좌르르 풀어놓은 숱한 아이디어들 가운데, “멀쩡한 남자와 여자가 유괴를 저지른다. 남자는 죽고 여자와 어린애만 남는다”는 싱거운 두 문장이 변영주 감독의 귀에 유독 감겨들었다. 듣자마자 두 그림이 떠올랐다. 하나는 범죄에 실패한 한 남자가 두려움에 울며 땀투성이로 도망치는 장면, 하나는 어느 꼬마와 여자가 멀리 지평선이 걸린 길을 걷는 모습이었다. 며칠 뒤 그는 오 PD에게 전화를 걸어 “형, 그거 내가 하고 싶으니까 이제 그런 영화 만들겠다는 말, 하고 다니지 마!”라고 다짐하고 있었다. <유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닻을 올린 프로젝트는 박찬욱 감독의 또다른 유괴영화 소식이 들리면서 가제를 <피크닉>으로 바꿔 달았다.

현재 시나리오 초고까지 진도가 나간 <피크닉>은 ‘이 땅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을 노래할 수밖에 없는 영화처럼 들린다. 변영주 감독은 그리 길지 않은 인터뷰 중 <피크닉>을 가리켜 “한마디로, ‘그녀의 인생을 살다’예요”라고 세번쯤 말했다. 한 여자의 인생에 한 남자와 한 어린아이가 잠시 들렀다간 사건을 기록하긴 하지만, 영화가 줄곧 뜨겁게 주시할 진짜 주인공은 결국 ‘그녀’라는 소리다. 여자 역 캐스팅에 힘이 실릴 것도 당연한 노릇. 다큐멘터리도 내내 필름으로 작업해온 변영주 감독은 첫 장편 극영화 <피크닉>의 밑그림을 자연광 조명과 핸드헬드 촬영으로 어렴풋이 그려보고 있다. “실내 신이 많지만 모든 것이 다 보여야 한다고 생각지 않는다. 대신 보이는 것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어야 한다. 핸드헬드 촬영의 정수는 흔들리지 않으려는 안간힘에 있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이들의 ‘친절한’ 걱정과 달리 변영주 감독은 충무로 적응에 자신있어 한다. 기록영화 제작소 보임 시절에도 “우리도 설득 못하면 어떻게 관객을 설득하겠냐”는 엄한 기획팀을 납득시켜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던 그다. 자기를 ‘스폰지’라고 부르고 또 감독은 그래야만 한다고 여기는 변영주에게, 충무로 데뷔는 흡수할 에너지 원이 더 많아졌다는 희소식이다. 그가 지금까지 실감한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사이의 가장 깊은 골은, ‘존재하는 인간을 응시하는 작업과 존재하지 않는 인간을 창조하는 작업의 간극’. 캐릭터를 꼼꼼히 매만지기보다 자꾸 살아 있는 사람인 양 속넓게 받아들이려 해서 골치라고.

변영주 감독은 지난 1월 왼쪽눈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 그건 영영 직접 카메라를 잡기 힘들다는 뜻이고, 다시 다큐멘터리를 찍는다 해도 7년간 터득한 방법론에 안녕을 고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촬영감독과 협력할 <피크닉>은 미래의 모든 변영주 영화들을 위한 ‘발명’의 작업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저, 감독님 존경해요!’말고 ‘저, 감독님 영화 봤어요’라는 소리를 듣고 싶다.” 그것이 11월의 스산한 바람이 불면, 용감하게 첫 충무로 피크닉에 나설 변영주 감독이 슬쩍 내비치는 희망사항이다.

연출의 변

“ 누가 누구와 마침내 소통했다는 이야기는 내게 그다지 재미있지 않다. 그보다 그 소통을 이뤄내기 위한 망설임과 꿈틀거리는 모멘트들이 재미있다. “너 아프지?” “아니.” “너 아프지?” “아니.” “너 아프지?” 그런 문답을 질기게 거듭해 끝내 “그래, 나 실은 아파”라는 대답을 듣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카메라 움직임만으로 인물의 관계를 설명하는 다큐멘터리에서 축적한 경험도 잘 활용해볼 심산이다. ”

이런 영화

주인공은 <나쁜 영화> 속 소녀의 10년 뒤가 이렇지 않을까 싶은 20대 여자. 20대 후반의 어느 평범한 은행원과 그녀는 ‘나름의 방식’으로 연결된 커플이다. 여자는 은행원의 자취방에 정한 때 없이 찾아들고 남자는 그런 여자를 사랑한다. 무거운 과거와 큰 빚을 짊어지고 있는 그녀의 고통을 덜기 위해, 남자는 무슨 일이라도 저질러서 돈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부잣집 딸을 유괴한다. 그러나 유괴한 꼬마는 마음의 흉터로 말미암아 입을 열지 않아 몸값 협상을 위한 목소리 녹음마저 여의치 않다. 여자는 밀폐된 장소에서 아이를 보살피다가 정이 들고 돈을 받아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남자는 사고로 어이없이 숨진다. 은신처를 잠깐 나선 여자는 TV로 남자의 죽음을 알게 되고, 가족에게 돌아가길 거부하는 아이와 함께 길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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