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 신작 프로젝트 [14] - 임창재 감독의 <하얀방>
2001-08-03
글 : 이영진
사진 : 이혜정
저주를 부르는 태아의 눈물

“홍상수 감독과 비슷하다면서요?”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된 뒤 처음으로 만난 자리에서 이은주가 임창재(37) 감독에게 던진 말이다. 하나 말이 그렇지, 난이도만 놓고 보면 임창재 감독의 전작들은 홍상수 감독보다 더 지독한 실험영화들이다. 내러티브 중간중간 기억과 무의식의 통로를 열어보이는 이미지들의 연쇄 탓에 처음 대하는 이들이라면 당혹감과 혼란스러움을 맛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영화들이 상당수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충무로에 뛰어들어 장편 데뷔 신고식을 치른다. “장편을 만들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지난해부터 훈련 삼아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는데, 아직 그 이야기를 꺼내기에는 시간적으로 무리가 따르는 것 같아 접어두고, 연출 의뢰를 받아들였다.”

<하얀방>은 ‘태아령’(胎兒靈)이 존재한다는 가설에서 출발한 이야기이다. 최초 영화의 컨셉은 ‘일본 열도에서는 낙태로 인해 세상과 만나지 못한 아기들의 영혼을 모신다는 신흥종교까지 있다. 우리에게도 분명 비슷한 형태의 모임이 있을 것이고, 이는 인터넷과 같은 사이버 공간일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올해 초 나온 시나리오를 이어받은 임창재 감독은 “여성들이 떠안을 수밖에 없는 결혼이나 가족과 같은 보편적인 제도의 문제를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통해 되짚어보려고 한다”고 연출 의도를 밝힌다. ‘사이버 공간인 하얀방에 들어가면 ···내에 죽는다’는 식의 설정 등은 일본의 <링> 시리즈와 유사해보일 수 있어 현재 수정중. 하지만 별로 문제될 것 같진 않다. 심리적인 공포보다 현실적인 사회문제쪽에 방점을 두고 있어 차별점은 뚜렷해보인다.

임창재 감독은 스토리는 지금도 만족스러운 상태라며, 지금은 이걸 시각적인 이미지들로 어떻게 변환하느냐를 고민하는 단계라고 말한다. 일단 호러적인 요소가 가미되는 장면에서 ‘CG보다는 아날로그적인 형태로 승부를 건다’는 원칙을 세웠다. 하얀방을 어떻게 꾸밀지도 숙고의 대상이다. 엄연히 다른 세계이지만, 동시에 이질적으로 분리된 것처럼 보여서도 곤란하다. 그래야 현실과 비현실이 뒤섞이는 결론으로 치달을 때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본격적인 프로덕션에 들어가면 충무로 스탭들의 도움도 많이 받겠지만, 지금까지 자신과 함께 작업해왔던 친구들이 사전 단계부터 연출부 등 스탭으로 참여하고 있어 든든하다. <그녀 이야기> <청춘> 등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의 경계를 넘나들며 작업하는 함순호 촬영감독이 카메라를 잡는다는 것도 큰 힘이 된다는 게 그의 귀띔.

장편 데뷔를 앞둔 지금 임창재 감독이 가장 많이 떠올리는 건 민중문화운동연합 시절, 집체극을 찍어 ‘슬라이드 쇼’를 하던 장면이다. 그때로부터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 아니다. “함께 만들고, 같이 나누던 시절의, 말하자면 원체험과도 같은 강렬한 기억”을 다시는 못 느낄 것 같은 느낌 때문이다. “충무로 간다고 했더니 반대하던 동료들이 그러더라. 충무로 가면 혼자 지친다고, 그러면서도 결국 빠져나오지 못한다고 말이다. 한편 한다고 그렇게 되겠나. 하지만 항상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돌아갈 때가 되면 돌아갈 것이다.” 어쨌든 실험영화를 거쳐 부상한 한 서른 감독이 충무로에 남길 “뚜렷한 징표 하나”가 무엇인지 궁금할지라도, 관객으로선 기다림밖에 수가 없다.

연출의 변

“누구나 그랬겠지만 처음에는 두려웠다. 실험영화연구소에서 활동할 때부터 대중적인 것이 뭔가라는 물음을 갖고 있었는데, 막상 부딪치는 시점이 되니 더 그랬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나아진 것 같다. 처음에는 어떻게 마무리하나 싶었는데, 이제는 장편으로 안 보이고 단편처럼 보인다. 한 시야에 들어오는 느낌이랄까. 야구선수가 어느날부터 볼이 크게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결과야 좀더 기다려봐야겠지만.”

이런 영화

임신중인 수진은 방송국에서 비디오 저널리스트로 일하고 있다. 수진은 동료이자 연인인 이석에게 일을 위해 낙태하겠다는 결심을 통보한 상태다. 그러던 중 후배 민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하지만 수진은 민주의 죽음을 둘러싼 소문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 죽기 직전까지 자신은 임신한 것이 아니라며, 알 수 없는 행동을 보였다는 것도 그렇지만, 직접적인 사인이 폐쇄된 사이트인 ‘하얀방’과 관련되어 있다는 풍문도 믿지 않는다. 그러다 민주와 유사한 사례가 있음을 확인한 민주는 취재를 위해 인터넷을 뒤지게 되고, 결국 ‘하얀방’에 들어가게 된다. 그곳에서 낙태와 관련된 악몽 같은 전언을 받아들이지만, 수진은 낙태를 선택한다. 얼마 뒤, 일을 계속하던 수진은 방송 도중 갑작스런 복통을 호소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서 분명히 꺼내 버렸던 아이가 다시 뱃속에 들어와 있음을 느끼게 된다. 소문은 진실이었던 것일까. 수진은 곧 자신에게 닥칠 생명의 위협에 대한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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