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타이틀]
강명석의 Shuffle! <친절한 금자씨>
2006-01-24
글 : 강명석 (기획위원)
금자씨가 가진 도덕성

<친절한 금자씨>에 대한 한 가지 의문. 교도소 안에서 금자는 마녀를 죽인다. 그런데 금자는 딱히 마녀를 죽일 이유는 없다. 마녀도 금자만큼은 괴롭히지 않았다. 금자가 마녀를 죽이는 건 오히려 교도소 사람들이 마녀를 죽이고 싶어하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영화는 교도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만한 근거를 ‘섹스’로 제시한다. 마녀가 같은 재소자에게 폭압적으로 섹스를 요구하는 장면은 그 구체적인 장면이 잘 묘사되지 않거나, 폭력성이 강조되지 않는다. 반면 마녀가 재소자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장면은 꽤 긴 시간동안 자극적으로 묘사된다. 이 씬의 불쾌함으로 인해 마녀는 죽어 마땅한 존재가 된다.

이는 백선생을 묘사하는 방식에서도 마찬가지다. 백선생이 등장한 직후, 영화는 그가 아침을 먹다가 금자의 교도소 동료였던 박이정을 거의 강간하듯 섹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장면을 통해 백선생이 얼마나 악한 캐릭터인지 그대로 드러난다. 즉, <친절한 금자씨>에서 유괴와 영아 살인을 제외한다면 강압적인 섹스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나쁜 짓인 셈이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금자씨는 여기서 어떤 윤리적인 ‘고민’을 하지 않는 것 같다. 그는 그런 행위의 인간을 살인으로 단죄, 혹은 복수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무덤덤할 정도로 아무 감정 없이 살인을 저지른다.

그래서 그가 영화 후반 자신은 살인을 했다며 괴로워하는 모습은 오히려 농담처럼 들릴 정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 자체도 어떤 ‘명제’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즉, 유괴를 하는 것은 나쁘다, 강제적인 섹스는 나쁘다라는 것처럼 살인을 한 것도 나쁘다라는 식으로 살인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건 마치 학교의 윤리 교과서에서 말하는 그대로를 머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금자씨는 절대적으로 ‘착하다’ ‘나쁘다’같은 기준을 세울 수 있는 윤리적 명제 이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없는 인간이다. 그리고 그 절대적인 기준이란 것 역시 자기 자신이 스스로 깨달은 것이라기보다는 사회가 그렇게 가르친 개념이다. 백선생이 아이를 유괴해서 번 돈으로 뭐했냐는 아이 부모들의 질문에 금자씨가 요트를 샀다고 대답하자 부모들이 보여주는 경멸스런 표정은, 이 영화에서 사람들이 윤리적 명제를 받아들이는 방식을 보여준다. 유괴를 해서 자신의 향락을 위해 돈을 쓴 것은 이해할 가치조차 없이 거의 조건반사적으로 경멸할 수밖에 없는 행위다.

대신 그런 절대적인 기준을 넘어서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무감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윤리적인 문제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을 죽이고 나서도 태연하게 계좌번호를 금자에게 적어주며 유괴시 빼앗겼던 돈을 되찾으려 할 수 있다. 영아살해범은 죽어 마땅하다는 것을 고민의 과정 없이 당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무감하고, 그래서 윤리적 고민대신 자신이 지금 필요한 것부터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세상의 수많은 문제에 대해 무감하고, 그만큼 그것들에 몰입하여 고민하는 대신 거리를 두고 냉소적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는 ‘섹스’를 캐릭터의 인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유용하게 쓸 수 있다. 예쁘거나 코믹하게 묘사되는 살인보다 거칠고 자극적인 섹스가 관객에겐 훨씬 ‘나쁜’ 것으로 다가올 수 있으니까. 그래서 금자에겐 ‘예쁜 것’이 중요하다. 자신의 윤리적 고민이 결여된 인간에게 남는 건 나의 행동이 얼마나 착하냐 못되냐가 아니라 얼마나 더 아름다울 수 있느냐는 것이니까.

그런데 이건 생각해 보면 현대인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솔직히 얘기해서, 우리가 금자와 다르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가. 존속 살인처럼 누구나 ‘악’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는 쉽게 분노한다. 하지만 그 외의 것들에 대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 9.11 테러가 터졌을 때 정말 처음부터 그들의 죽음에 대해 슬퍼한 사람은 얼마나 될 것인가. 오히려 우리는 무역 센터의 폭파 장면을 ‘구경거리’처럼 보고, 쓰나미의 재해에 ‘그런가보다’하고 넘어가지 않았을까.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의 살인사건 현장 재연에 달려드는 언론처럼, 우리는 어떤 강한 시각적인 자극이 있어야 거기에 달려들고, 그 뒤에 윤리적인 고민을 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말하지 않는가. 금자의 물방울 원피스가 유행하고, 어느 ‘지각없는’ 감독은 금자를 소재로 영화를 찍고 싶어했다고.

우리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것들에 대해 그렇게 깊이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누구나 그러하다고 생각하는 윤리적 명제, 혹은 TV에서 ‘극악무도’하다고 말하는 그것들을 보며 ‘덤덤하게’ 분노할 뿐이다. 금자가 영화 후반에서 보여주는 살인에 대한 고민은 살인을 했다는 사실에 대한 괴로움이라기보다는 살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무감한 자신에 대한 고민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살인을 했는데 왜 나는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할까.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는 이야기가 주는 감정보다는 논리성을 중요시 한다. 교회 전도사가 갑자기 흥신소 직원으로 변하는 이유 같은 건 필요 없다.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만 있으면 상관없다. 또 그런 사건들의 감정적인 흐름 같은 건 보여주지 않아도 산골 분교에서 금자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비디오테이프를 틀어 줄 수 있는지는 그 이유를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다보니 <친절한 금자씨>는 계속 관객들에게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마치 TV 뉴스를 보는 것처럼, 관객들은 금자의 행동에 몰입하는 대신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영화 속에서 벌어지는 그 기묘한 상황들에 피식피식 웃게 될 뿐이다.

<친절한 금자씨>의 음악은 그런 거리두기의 효과를 극대화한다. 비발디와 파가니니의 클래식 곡들과 최승현의 창작곡으로 만들어진 <친절한 금자씨>의 음악들은 그 자체로는 우아하고 무게감 있게 진행된다. 하지만 감정선과 유사한 흐름을 보여주는 대신 웃기거나, 혹은 무덤덤하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친절한 금자씨>의 영상은 영화의 낯선 느낌을 더욱 극대화한다. 금자가 과거 자신을 수사한 형사를 만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음악은 클래식이 흘러나오지만, 이들의 만남은 우아하다거나, 혹은 둘 사이의 감정선을 보여주기 보다는 건조하게 금자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장치로 쓰일 뿐이다.

<올드보이>에서 왈츠의 사용이 폭력의 실제 감정선은 제거하고 그것을 우아한 동선으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면, <친절한 금자씨>의 음악은 음악이 담고 있는 감정은 제거되고, 화면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배경음악으로 사용된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의 전반부의 음악들은 기타나 바이올린으로 연주되는 하나의 선율이 강조된다. 그 선율이 부각되면서 영상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친절한 금자씨>는 사회에 의해 명제처럼 굳어진 윤리가 아니라 인간의 진짜 ‘감정’을 다루는 순간부터 조금씩 변화한다. 금자의 딸 제니가 자신의 엄마에 대해 생각할 때 등장하는 노래는 씬이 담고 있는 감정을 보다 강조하는 일반적인 영화음악과 같은 효과를 노리고 사용되고, 부모들이 아이의 죽음을 눈으로 지켜보며 분노하는 순간부터 음악은 선율의 강조대신 낮게 깔리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통해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등장인물의 감정을 전달한다. 즉, ‘머리’로 받아들이던 윤리적 명제가 자신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문제가 되었을 때, 인간은 드디어 그것에 대한 감정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때가 되어야 인간은 진정한 속죄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닐까. 백선생을 죽인 뒤에도, 금자는 여전히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 왜 그렇게 ‘나쁜’일인지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금자는 백선생을 죽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자식을 얻었고, 자식을 잃은 사람의 슬픔을 알게 되며, 이를 통해 드디어 ‘속죄하고픈 인간’이 된다. 그의 속죄가 사회가 정해놓은 두부가 아니라 케이크로 하는 것일지라도, 그는 이제 나름의 윤리관을 가진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친절한 금자씨>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렇게 작은 것은 아니었을까. 그저 조금만 더 마음속으로 슬퍼할 수 있다면, 우리는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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