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에 들 때까지, 도전 또 도전
<취화선> <천년학>의 임권택 감독
그의 인물들은 떠돌이 운명을 지녔다. 그와 함께해온 스탭들 또한 다르지 않다.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스탭들은 ‘유랑’을 각오해야 한다. <취화선>에서 오원 장승업이 정처없이 떠도는 장면. 모든 스탭들이 강원도에서 전라도까지 버스로 이동하며 장승업의 궤적을 만들어갔다. 눈감고 상상해보라. “아, 여기야”라는 감독의 낮은 탄성. 기다렸다는 듯 모든 스탭들이 버스에서 내려 촬영 준비를 서두르는 풍경을. <취화선>뿐만이 아니다. <천년학> 제작진 또한 9월부터 또 한 차례의 유랑을 계획하고 있다. “세트를 짓더라도 대개 10%밖에 안 찍는다.” 한 스탭의 말이다. ‘남도화첩’이라 불러도 좋을 법한 영화 속 가경(佳景)들은 발품 팔아 찾은 실경(實景)들이 거개다. 지치고 꺼릴 법도 하건만 스탭들은 감독의 이런 스타일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오랫동안 감독을 도운 한 스탭은 이렇게 전한다. “적절한 촬영장소를 알고 있어도 미리 일러주지 않는다. 대신 물색해온 장소를 보고 이곳이 왜 아닌지만 자세히 이야기해준다. 캐스팅도 마찬가지다. 스탭들은 감독의 머릿속 그림이 무엇인지 알아맞히기 위해 오류를 반복해야 한다.” 끊임없는 대화로 상대가 스스로 진리를 깨닫게끔 했다는 소크라테스식 교육? 어쨌든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은 후배들에게 자연스레 전수된다. <혈의 누> 촬영을 앞두고 옛 풍경을 찾기 위해 애먹었던 김대승 감독은 결국 조감독 시절 스승과 함께한 남도기행을 떠올리며 <서편제> <태백산맥> 등의 촬영지를 요긴하게 끌어와 변형했다.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강제규 감독
그는 연출에만 신경 쓰는 감독이 아니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마케팅까지 직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어쨌든 한번이라도 작업한 이들은 그가 감독인 동시에 제작자 마인드를 가졌다고 입을 모은다. 로케이션에서도 그런 성향과 능력은 곧장 발휘된다. <태극기 휘날리며>의 경우, 전주 전동성당에서 임시 야전병원 장면을 찍으려 했었다. 제작진은 사전에 성당쪽으로부터 허락을 받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촬영 직전에 성당의 가장 높으신 분의 ‘촬영 불가’ 한마디 때문에 번복됐고, 제작진은 다른 촬영 후보지를 갑자기 찾아야 했다. 시나리오에서 성당이 부정적으로 그려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랬을까. 프로듀서를 비롯한 스탭들은 갑작스럽게 약속을 파기한 성당쪽에 항의했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반면, 그는 이전에 한 차례 둘러봤던 공세리 성당을 미련없이 택하자고 했다. 한 스탭은 “내부 공간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했다. 그런데 촬영이 무산됐는데도 별말이 없더라. 다른 감독 같으면 어떻게든 그곳에서 찍게 만들어 달라고 화를 냈을 텐데 말이다. 우리가 그렇게 화를 내는 동안 그는 공세리 성당을 이미 떠올리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찍어야 좋을지를. 나중에 촬영 화면을 봤는데 콘티를 변경해서 성당의 외부를 만족스럽게 찍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150억원 이내의 제작비로 <태극기 휘날리며>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도 기회비용에 대한 그의 빠른 판단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다고.
사실적 세팅이 가장 중요하다
<박하사탕> <오아시스>의 이창동 감독
<오아시스>에는 코끼리가 등장한다. 공주(문소리)의 집에 코끼리가 나타나는 장면은 타이에서 찍었다. 농담처럼 덩치 큰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어 한국으로 공수할 순 없는 일. 이 장면은 제작진이 타이에 직접 세트를 만들어 찍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국 촬영 때 쓰였던 공주의 집 세트를 타이로 보내 현지에서 재조립하도록 했다. 통관 절차도 번거롭거니와 현지에서 만드는 것이 비용도 절감된다는데, 왜 한국에서 쓰던 세트를 뜯어 비행기로 날랐을까. 게다가 촬영이 끝나면 세트는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될 터인데 말이다. “새로 세트를 만들 경우, 기존 것과 똑같은 느낌을 낼 수 없을 것이라는 게 감독님 생각이었다. 한국 촬영 때 장소를 옮겨가며 세트 분해와 조립을 반복한 터라 타이로 보낼 때는 세트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그의 고집은 다름 아닌 배우들을 위한 배려 때문이었다. 한 스탭은 “사실적인 세팅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긴다. 배우들이 감정을 끌어내기 위해서 그런 환경들이 조성돼야 하고, 세트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배우들의 지속적인 감정 분출을 가로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박하사탕>에서 영호(설경구)가 카페 종업원 경아와 하룻밤을 보내는 장면도 다르지 않다. 실제 이 장면의 외관은 군산에서, 내부는 서울 마포의 한 술집을 개조해서 찍었다. 내부 촬영 때 그는 배우의 연기를 위해 미술팀에게 술집 외관까지 실제 카페 물망초와 똑같이 보이게 해달라고 주문했을 정도다.
세련된 공간보단 후줄근하고 촌스러운 공간을!
<강원도의 힘> <극장전>의 홍상수 감독
세련되고 모던한 공간을 싫어한다. 반대로 후줄근하고 촌스러운 공간을 선호한다. 이를테면 ‘모텔은 노, 여인숙은 예스’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연출부였던 한 영화인은 “다 마다하고 항상 말할까 말까 고민했던 최악의 장소들을 첫손에 꼽으셨다”고 전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신림동의 한 극장을 촬영 장소로 정할 때도 그랬다. 외관이나 촬영 조건을 따지기보다 매표소 안의 더러운 담요와 지저분한 구들장에 끌려 선택했다. “그때도 애매모호한 앵글을 좋아했고, 촬영도 통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하는 걸 즐겼다.” 그런 그가 뽀사시한 세트에서의 촬영을 좋아할 리 없다. <강원도의 힘> 이후 작품 중 세트에서 촬영된 장면은 단 하나도 없다. 최근까지 함께 작업한 한 스탭은 “매일 똑같은 장소라고 하더라도 햇빛 하나, 바람 한점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면서 로케이션을 고집하신다”고 말한다. 세트가 전무한 탓에 미술팀의 역할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극장전> 이후 아예 미술팀없이 작업한다. 그의 스탭이라면(혹 스탭이 되고 싶다면) 꼭 염두에 둬야 할 것 하나. OK가 떨어진 장소는 사사로운 소품 하나라도 고스란히 ‘현장 보존’해야 한다. 조그만 변화가 분위기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다는 그의 굳은 믿음 때문이다.
현장 상황에 맞춰 에피소드도 그때 그때 슥슥~
<악어> <시간>의 김기덕 감독
그는 ‘빨리’ 찍는다. 촬영은 길어야 한달이다. 이곳, 저곳, 로케이션을 벌인다면 그 시간 안에 촬영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데뷔작 <악어>부터 최근작 <시간>까지, 그가 택한 촬영지는 그리 많지 않다. <악어>는 한강의 중지도에서, <시간>은 서울 홍익대 앞 카페와 인천 영종도의 조각공원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로케이션에는 언제나 발목 잡는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특히 한 지역에서 많은 촬영을 해야 하는 경우 문제가 발생하면 걷잡을 수 없다. 해당 장소가 섭외되지 않으면 작품 전체를 뜯어고쳐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금까지 운이 좋았던 것일까. 근작들의 제작을 도운 프로듀서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대단한 이야기꾼이다. 이야기꾼이 아니었다면 그런 방해물을 쉽사리 넘지 못했을 것이다.” <활>의 경우, 애초 배경은 배 위가 아니라 공해(公海)상의 무인도였다. 그러나 촬영이 임박해서 촬영 장소를 바꿔야 했다. “촬영 일정을 미룰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곧바로 배로 공간을 바꾸고는 그에 걸맞은 에피소드로 끼워넣더라. 경탄하면서도 그 속도가 너무 빨라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섬>은 어떤가. <섬> 또한 애초 계획대로라면 바다로 둘러싸인 ‘섬’에서 찍어야 했을 영화. 그러나 그는 기상 탓에 촬영이 어렵게 되자 저수지로 설정을 바꾸고, 이야기를 뜯어고쳤다. 그런 능력이 없었다면, “러닝타임과 촬영시간이 동일한 영화를 만들겠다”며 감행한 <실제상황> 같은 프로젝트는 엄두조차 못 냈을 것이다.
미션, 독특한 공간찾기!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의 박찬욱 감독
스탭들에게 꽤나 자세한 주문을 할 것 같은데, 알고 보니 아니다. 지하실, 식당, 옥상, 뭐 이런 식으로밖에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한다. 볕이 드는 창이 몇개쯤 있었으면 좋겠고 하는 식의 요청은 별로 없다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 류(신하규)가 장기밀매를 하는 장소 또한 처음엔 그저 ‘지하실’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류는 지하실이 아니라 지상에 있는 독특한 구조의 폐공장을 찾아간다. “특이한 공간을 좋아하시는 편이다. 그런데 그 공간을 영화 속에서 어떻게 쓸지는 알 수 없다.” <복수는 나의 것>의 폐공장은 연출부가 헌팅을 하면서 발견한 곳으로 모양이 튄다 싶어 그냥 장난 삼아 사진을 찍었는데, 결국 영화 속 주요 공간의 하나로 남게 됐다. “이 장면은 세트, 이 장면은 로케이션 뭐 이런 식으로 단정하지 않으려 한다. 상관없어 보이는 공간들이라도 특이하면 일단 키프(keep)해뒀다가 어떻게든 연결을 만드신다. 남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용도로 쓰시는 거다. 그러다보니 연출부 사이에선 독특한 공간을 찾기 위해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가 가방에서 빠져나와 들판 같은 옥상에서 깨어나는 장면 또한 우연히 풀이 있는 한 아파트 옥상을 발견하고서 만들어넣었다고. 우연한 상상을 끊임없이 피워올리다 보니, 한 프로듀서의 말처럼 어찌 보면 “아귀가 안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올드보이>에서 대수가 탈출하는 장면과 그 다음 장면이 개연적인 연결은 아니라면서도, “긴 감금의 세월을 빠져나온” 인물의 감정을 설명하기엔 더없는 설정이라고 덧붙인다. “그는 가짜 세트를 진짜처럼 보이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게 그만의 영화를 만드는 방식이다.”
대안은 없다, 반드시 그곳이어야 한다!
<살인의 추억> <괴물>의 봉준호 감독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자신이 직접 주요 촬영 공간을 정한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구체적인 특정 공간을 염두에 두고 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플란다스의 개> 촬영을 앞두고 아파트는 문정동 OO아파트라고 찍었다. <괴물>의 촬영을 앞두고 극중 하수구는 원효대교 아래 있다고 일러줬다. 굳이 비유하자면, 족집게 선생님. 정답을 일찌감치 스탭들에게 내놓는 식이다. 번번이 허탕을 감수해야 하는 스탭들로선 섭외만 하면 되는 이런 작업 스타일이 꽤 매력적일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함께했던 동료들은 거저먹기는 아니라며 고개를 젓는다. “따져보면 부담 백배다. 꼭 그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로케이션 장소 물색시 가장 애먹는 건 바로 이런 경우다. 대안없는 장소인데 촬영은 안 된다고 할 때. <플란다스의 개>의 지하실이 그랬다. 일자로 길게 뚫린 공간이어야 한다며 봉 감독이 일러준 한 아파트를 섭외하기 위해 스탭들은 관리인들을 붙잡고서 한때 해당 아파트에 살았다는 감독의 아버지 이름을 팔기까지 했다(어떻게 팔았을까?).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하되 과거로 거슬러 오른 <살인의 추억>은 어땠을지 짐작이 가지 않나. 감독은 용의자와 몽타주를 대조해가며 취조하는 형사처럼 당시 자료 사진의 풍경과 헌팅 장소를 비교했고, 채근당한 스탭들은 촬영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방방곡곡 강행군을 계속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