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허가를 받지 못해서 도둑촬영을 했다. 한국과 중국의 축구경기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얻은 방송사 조끼를 껴입고서 카메라를 반입하는 해프닝을 벌였다.”(<쉬리>) “약속이 되어 있던 나이트클럽이 문을 안 열어주는 바람에 결국 촬영을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비트>) “섭외를 위해 주인에게 ‘젊은 놈 하나 살려주십시오’라는 눈물로 쓴 장문의 편지를 보내야 했다.”(<8월의 크리스마스>) 불과 몇년 전 일들이다. 그때, 한국영화 로케이션 공식은 저지르고 보는 무데뽀였다. 감독이 점찍은 공간이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촬영허가를 따내야 했고, 틀어지면 불법을 저질러서라도 촬영을 강행해야 했다. “제작부 막내 때 스탭들이 식사할 식당 잡아놓고 난 다음에 하는 일이 다음날 촬영 장소 섭외였다. 지금처럼 감독과 스탭들이 함께 사전 헌팅 회의를 하고 로케이션 계획을 미리 짜는 것도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 싸이더스FNH 윤상오 이사의 말처럼, 지난 몇년 동안 한국영화 로케이션의 모양새는 꽤 많이 바뀌었다. 일례로 시나리오 회의를 통해 컨셉 회의를 한 뒤 제작부와 연출부 스탭들이 함께 짝을 이뤄 극중 공간에 맞는 현실의 공간을 찾아나서는 헌팅 작업이 그러하다. 여기에 부산영상위원회를 시작으로 로케이션 업무를 지원하는 영상위원회들이 크게 늘었다. 하지만 로케이션의 어려움이 줄어들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통제가 비교적 용이한 비밀스러운 세트촬영과 달리 로케이션 촬영은 위험천만한 변수들이 상존하고 있어서다. 여기 마련한 로케이션 백과사전에서 희열보다는 푸념이 더 많이 담겨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헌팅이 영화의 절반”이라고 믿으며 단내나는 추적작업을 하고 있는 <톰과 제리>(가제) 스탭들의 발걸음과 다시 떠올리기 싫은 로케이션 악몽에 관한 스탭들의 토로 등을 함께 묶어 내놓는다. 촬영현장의 땀냄새가 조금이라도 풍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찾아라! 영화로 태어날 기막한 현장을
<톰과 제리> 로케이션 헌팅을 통해 본 로케이션의 비밀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4·19 기념탑 앞. 헌팅을 앞둔 <톰과 제리>(가제) 제작진이 삼삼오오 모여 있다. 촬영 시작을 코앞에 둔 스탭들로선 ‘따라붙기’ 취재가 영 성가실 것이다. 경험으로 봐서 초장부터 진드기 같은 인상을 남기면 곤란. 일단 좀 쭈뼛거렸는데, 바로 전 인사만 나눈 김신성 조감독이 잡아끈다. “<오아시스>가 왜 좋은 영화인 줄 알아요?” 이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 근데, 듣고보니 꽤 흥미롭다. “비두타(非頭打) 영화거든요. 설경구가 짱깨 배달 갔다가 늦게 오는 장면 있잖아요. 3류 조폭영화였다면 주인이 머리를 때릴 텐데. <오아시스>는 매를 들어서 엉덩일 때리지요. 이창동 감독님이 선생님 출신이어서 그런가. 어쨌든 두타 영화는 문제예요. 머리 때리면 즉자적으로 관객이 웃을 수밖에 없죠. 하지만 좋은 영화적 태도는 아니에요. 날로 먹겠다는 거지. 그런 관점에서 <톰과 제리>는 괜찮죠. 비두타 영화거든요.”
다른 스탭들은 별 반응없다. 한두번 들은 ‘썰’이 아닌가보다. 둘러보니 오늘 헌팅에 참여하는 스탭 수가 예상했던 것보다 많다. 주요 스탭들이 모두 참여하는 확인헌팅이라고 듣긴 했지만, 전달받은 참여인원은 대여섯명 정도. 근데 눈대중으로만 봐도 열명 가까이다. 제작부 임인석씨에게 물었더니 도합 13명. 김광훈 감독, 김상민 프로듀서 등은 <톰과 제리>에서 장병진으로 출연하는 유해진의 헤어 때문에 미용실에 들렀다 오느라 늦어진다고 한다. 유해진은 <톰과 제리> 외에 다음날부터 촬영에 들어가는 장규성 감독의 <이장과 군수>에도 출연하는 상황. <톰과 제리>쪽이 원하는 헤어는 긴 머리인데 <이장과 군수>쪽의 요구로 혹시나 과감한 커트를 감행할까봐 걱정된 두 사람은 오전 헌팅까지 미루고 급히 미용실로 향한 듯했다.
험한 욕설을 입에 줄줄 달고 다니는 주부형사 이경주(염정아)와 아직 공소시효가 남아 짭새만 보면 도망치기 바쁜 장병진. 이들이 살인사건에 휘말리면서 <톰과 제리>의 쫓고 쫓기는 드라마를 만든다. 제작진이 처음 들러야 할 곳은 오 총경의 집. 오 총경은 이경주의 상관으로, 그는 과거의 원한 때문에 갓 출소한 누군가로부터 피습을 받게 된다. 고위 공무원의 집으로는 기념탑 코앞에 있는 노란색 저택도 꽤 어울리는 것 같아 물었더니 김신성 조감독 왈. “영국에선 헌팅 가자는 말을 ‘레키(recce) 가자’ 그래요. 척후병이라는 뜻인데. 척후병이 뭐예요. 깊숙이 들어가야죠. 이렇게 길가에 있는 곳을 택하면 다들 별로예요. 사실 영화사 근처에도 얼마나 좋은 공간들이 많은데요. 근데 그거 잡아오면 알로(날로??) 먹으려고 한다고 뭐라고 해요. 그런 공간들은 20회차 정도 지나야 좀 먹혀요. 지니고 있다가 그때 대령해야죠.” 이러다간 아무래도 안 되겠는지 박종일 비주얼 슈퍼바이저가 끼어든다. “쟤는 조감독 못할 뻔했어요. 지난번 명동 추격전 헌팅 때도 혼자서 영국 타령했거든요. (웃음) 고급 주택가가 쭉 몰려 있는 곳은 좀 식상하잖아요. 감독이 지나치게 영화적 세팅 공간처럼 보이는 곳은 좀 싫어해요.”
오 총경의 집은 수유동 골목길에 있는 양옥집으로 낙찰!
약속 시간인 1시가 조금 넘어서 김광훈 감독을 비롯한 후발대가 도착했다. 김광훈 감독은 식사는 나중에 해도 된다며 서두른다. 확인헌팅은 사전에 제작부와 연출부가 각각 1명씩 조를 짜서 찾아온 공간들 중 가장 이미지가 마음에 드는 공간들을 주요 스탭들이 함께 돌며 점검하는 작업이다. 100m 정도 안쪽으로 들어간 골목길에 접어들자 제작부 임인석씨가 찾아냈다는 양옥집이 보인다. “20년 전이라면 모르지만 요즘 집치곤 별로잖아요. 저쪽으로 가면 깨끗한 집들만 있는 곳이 있는데….” 김효정 제작실장은 좀 불만이다. 맨 먼저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김광훈 감독은 생각이 다르다. “난 지저분한 게 더 좋은데. 부잣집이라고 해서 일률적으로 좋은 집들만 있는 건 좀 싫어. 다만 이 집 뒤편으로 산이 보이는 게 좀 그러네.” 산이 보이는 것이 무슨 문제? 어리둥절해하고 있는데 김상민 프로듀서가 “전원주택 같은 느낌이 날까봐 꺼려하는 것 같다”고 일러준다.
제작부와 조감독들은 감독이 오케이 사인을 내줄 기미가 안 보이자, 근처의 다른 후보 집으로 이끈다. 지나왔던 집보다는 훨씬 규모가 커서 총경 집으로는 그럴듯하지만, 문제는 감독이 싫어하는 전원주택 분위기가 좀 더하다. 김광훈 감독은 김신성 조감독에게 “아까 거기가 제일 낫다. 너희가 찾아온 것 중에서 (오 총경 집으론) 가장 근접하다”면서 다시 한번 가보자고 한다. 오후 시간대에 주광원의 방향이 어떻고, 광선의 세기는 어떤지를 체크하던 이은수 조명감독은 두집 모두 딱히 맘에 드는 눈치가 아니다. “시나리오상에 나오는 오 총경 집으로는 좀 없어 보여서….” 느낌은 괜찮다고 했지만, 김광훈 감독도 비좁은 골목에서 과연 촬영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인 듯한 표정이다. 좁은 골목에 오 총경이 주차를 하려다 낯선 사내로부터 습격을 받는 장면이다보니 카메라와 배우들의 넉넉한 동선 확보가 필수인데 그만큼 충분한 공간인지는 자신을 못하는 눈치다.
김광훈 감독이 김동천 촬영감독에게 의견을 묻는 동안 박세환 제작부장은 저택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옳거니’ 한다. 저택 왼쪽에 차고가 있음을 발견한 그는 김광훈 감독에게 다가가 오 총경이 골목길 주차선에 차를 세우는 것 말고 다른 동선을 제안한다. 김광훈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여기 픽스(fix)시키려고 단단히 맘먹었네”라고 놀린다. 연출부와 제작부로선 감독이 싫다고 하면 다시 먹잇감을 찾으로 땡볕 나들이에 나서야 할 판.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총경이 별로 직급이 높지 않네. 경찰서장이라고 하니. 난 레벨이 높을 거라고 봤지. 군대 편제로 이야기했으면 쉽게 알아먹었을 텐데. 우리한테 군대는 가까워도 경찰은 멀잖아.” 오 총경 집치곤 너무 볼품없다는 의견을 냈던 이은수 조명감독이 뒤늦게 의견을 정정한다. 감독이 만족을 표시하자 스탭들은 3대의 차를 나누어 타고 근처 석관동으로 이동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