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 로케이션 대백과 [5]
2006-08-21
글 : 오정연
다섯개의 키워드로 알아본 한국영화 속 주요 공간 만들기

자동차 추격: <썸> vs <야수>

이보다 박진감 넘칠 순 없다

강도 높은 액션을 위한 로케이션을 물색·섭외하는 일은 일반적인 로케이션 헌팅보다 훨씬 까다롭고 중요하다. 일년 가까운 시간을 사이에 두고 개봉한 두 영화는 액션 중에서도 센 축에 속하는 자동차 추격, 그것도 역추격 장면으로 눈길을 끌었다. 자동차 액션을 위한 로케이션이 갖춰야 할 첫 번째 조건은 통제의 용이함이다. 첨단의 퓨전스릴러를 표방한 <썸>은 다양한 자동차신을 선보였지만 그중에서도 터널 속 자동차 추격은 새로운 시도였다. 차선 변경도 금지된 터널 안에서 중앙선을 넘나들며 대형사고를 재현하기 위해 공항신도시 근처의 도로를 섭외했다. 차량 통행량이 적은 서울 외곽 신도시 주변 개통 직후의 도로를 우선적으로 물색한 결과 발견된 장소다. 일단은 터널 안 왕복 4차선을 통째로 통제하더라도 바로 터널 위 도로로 차량을 우회시킬 수 있고, 터널 안에서 웬만한 속도에 이르기 위한 500m 정도의 구동거리를 확보할 수 있는 터널 밖의 조건도 양호했다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열혈형사의 막무가내 액션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 <야수>는 도심 속 자동차 추격으로 영화를 시작하며 박진감을 더했다. 인천 계양구청 앞길 왕복 6차선 중 5차선을 두 블록 정도 통제하며 일주일에 걸쳐 촬영했다. 로케이션을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빌딩 숲의 느낌. 빌딩 숲의 대명사인 여의도를 우선적으로 시도했으나 예상대로 허가는 불가능했다. 계양구 역시 안전사고의 우려 때문에 허가가 쉽지는 않았지만, 지인을 통해 섭외에 성공했다. 이후 경기도 평택에서 좁은 앵글을 위주로 보충촬영을 해야 했다.

산골 오지: <선생 김봉두> vs <웰컴 투 동막골>

오지에는 특별한 순수함이 있다

외부로부터 고립되어 본연의 순수함을 간직한 공간은 주인공의 마음뿐 아니라 관객의 내면까지 설득하고 정화한다. 물론 관객이 그러한 설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만한 장소를 찾아내려는 제작진의 노력은 별개의 문제다. <선생 김봉두>의 제작부가, 자동차 두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없는 굽이굽이 비포장 도로를 지나야만 도착할 수 있는 산골분교를 찾아낸 곳은 강원도 정선군 신동읍 연포리. 앞에는 동강이 흐르고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진짜배기 산골이다. 전국 방방곡곡에 위치한 분교 리스트를 작성하여 돌아다닌 끝에 찾아낸 이곳의 외향은 최적이었으나 문제는 지나친 고립성. 영월읍에서 촬영장까지 한 시간 반 거리. 지도에도 안 나오는 길을 따라 들어간 뒤 배를 타고 입성해야 하는 곳이었으나 촬영에 임박하여 마침 다리가 놓였고, 폐교된 연포분교 내외부와 주변 일대에서 영화 속 장면 대부분의 촬영을 진행할 수 있었다. 읍장님과 이장님의 전폭적인 지지로 실제 노부부가 살던 집부터 냉해로 출하를 포기한 배추밭까지 전천후 로케이션 섭외가 가능했던 곳이다. 반면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든 전쟁도 미칠 수 없었던 동막골을 완성하기 위해 <웰컴 투 동막골>의 제작진은 세 도(道)를 넘나들었다. 3, 4개월에 걸친 헌팅 끝에 영화 속 주된 세트는 강원도 평창군 탄광부지에, 메밀밭과 뱀바위는 전라남도에, 대숲은 담양에, 비행기가 추락한 벌판은 강원도 내 목장에, 눈밭은 강원도에 터를 잡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경우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는, 보기보다 문명화된(?) 조건의 촬영지였다는 것이 제작진의 평가다.

가상의 섬: <혈의 누> vs <마파도>

극적 긴장감엔 최고, 헌팅엔 최악!

섬처럼 한정된 공간에 인물을 몰아넣고 이야기를 전개하는 방식은 영화의 긴장감을 더하는 데 그만이다. 게다가 스탭들을 가둬놓고(?)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니 촬영지로서 섬이란 더할 나위 없지 않을까. 그러나 일반적으로 섬은 최악의 로케이션으로 꼽힌다. 변화무쌍한 날씨와 불편한 교통 탓이다. 게다가 컨셉이 확실한 가상의 섬이어서 딱 맞아떨어지는 외향까지 갖춰야 한다면 재고의 여지도 없다. 의미심장한 섬의 이름을 제목으로 내세운 탓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4개월 동안 전국의 웬만한 섬을 뒤진 <마파도> 제작진의 호기로움은 높이 사줄 만하다. 그러나 20, 30년 전에 20, 30가구 정도가 모여살았을, 현재는 다섯 할매가 살아가고 있을 만한 섬, 마파도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그처럼 작은 섬이라면 장비를 실은 차가 들어갈 배가 오갈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결국은 분지 형태의 지형과 우뚝 솟은 산 때문에 바다에서는 적당한 크기의 섬처럼 보이는 전남 영광의 한 마을에 오픈세트를 지었다. 바닷가 장면은 소각시도, 대각시도 등의 주변의 작은 섬에서 찍었다. <혈의 누> 속 피냄새 가득한 욕망의 지옥도가 펼쳐지는 동화도도 실제로는 섬이 아니다. 동화도의 다양한 풍광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섬이 실재할 것이라는 가능성은 희박했고, 섬 촬영의 불가능함은 일종의 전제였는데, 이는 <마파도>와 대비되는 지점. 여수 외포마을에 오픈세트를 지었고, 원규가 배를 타고 다가오는 동안 보이는 섬의 모습은 CG로 처리했다. 이를 위해 주요 스탭들이 섬의 외향을 면밀히 논의했고, 프로덕션디자인팀에서 이를 따라 섬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갔다.

도시의 맨 얼굴: <양아치어조> vs <연애>

전형적 묘사에서 벗어나면 낭만적 얼굴이 드러난다

상당수의 상업영화가 도시를 배경으로 삼지만 공간으로서 도시의 맨 얼굴에 별 관심이 없다. 소외된 이들의 터전인 뒷골목이라면 더욱 그렇다. 얄팍한 편견에 기댄 묘사에 그치기 일쑤다. 비교적 열악한 여건에서 만들어진 두 영화는 좀 다르다. 서울 강북과 강남의 대비가 주된 테마인 영화답게 <양아치어조>는 로케이션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직은 아파트가 점령하지 않은, 어깨를 맞댄 주택가에서 삶마저 서로 부딪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기 위해 조범구 감독은 기자촌부터 진관외동, 상계동 끄트머리, 보문동 등을 뒤졌다. 결국은 재개발 결정 직후의 대흥동에서 촬영을 진행했다. 지금쯤은 서울 시내 안에서 아파트가 보이지 않고, 노란 가로등 불빛을 간직한 곳은 없을 거라고 감독은 말한다. 독립제작방식 때문에 로케이션 섭외가 용이하지 않아 배경을 좀더 많이 담을 수 없었던 것이 못내 아쉽다. 자신에게 익숙한 도시의 모습을 영화에 옮긴다는 야심의 크기 면에서, 서울을 배경으로 한 <양아치어조>보다는 100% 부산 스탭과 함께 100% 부산 로케이션으로 진행된 <연애>가 조금 큰 편이다. <친구>로 대표되는 액션영화 속 부산의 거칠고 폭력적인 외향이 영화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세상에 치이는 여자의 연애담을 풀어놓는 <연애> 속 부산은 꿀꿀해도, 낭만적이다. 낮에는 부두에서 치열하게 일하는 이들이 보이고, 밤이면 항구의 조명이 따뜻하게 다가오는 영도의 주택가는 그런 느낌이 잘 살아 있는 공간. 실제로도 촌스러운 화려함이 쓸쓸함을 더하는 미시촌 촬영이 불가능해, 해운대 유흥가에서 촬영했던 것은 가장 큰 아쉬움 중 하나.

옛 서울: <말죽거리 잔혹사> vs <효자동 이발사>

몇 십년 전 모습도 간직하지 못하는 변화무쌍한 도시

구한말, 해방 전후는 물론이고 불과 몇 십년 전의 모습을 간직한 곳을 찾을 수 없는 게 서울의 현실이다. 60년대부터 80년대 초까지, 서울의 특정지역명을 제목에 새긴 두 영화의 고충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말죽거리로 불렸던 양재역 부근, 70년대 말 걷잡을 수 없는 개발이 시작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말죽거리 잔혹사>는 전북으로 향했다. 2층 주택집이며 슬레이트집, 비포장 도로에 학교만 덩그러니 놓인 풍경, 도로는 있지만 건물은 들어서지 않은 기이한 분위기 등 당시의 말죽거리와 유사한 조건이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정읍의 중학교가 상문고등학교로 탈바꿈했고, 군산의 작은 동네가 주인공의 거주지로 변했으며, 전주의 한의원은 종로2가의 학원가로, 김제의 나대지는 등교하는 학생들이 가득한 정류장으로 변신했다. 일단 장소를 확정하면, 컬러풀한 보도블록을 모래와 흙으로 바꾸고, 커다랗고 화려한 간판을 일일이 바꿔달고, 두줄짜리 중앙선을 한줄로 만드는 등 미술팀의 지난한 작업이 이어졌다. 몇 십년 전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물이 지속적으로 제작되는 충무로에서, 일제시대 세트만큼이나 절박한 것이 70, 80년대 종로 등 서로 다른 모습의 서울 곳곳을 재연한 세트라는 것이 제작진의 항변이다. 그러므로 20여년에 걸친 시간을 배경으로 하는 <효자동 이발사>가 영화 속 공간 대부분을 세트로 소화한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다. 발전이 덜 된 지방을 찾아다니며 <말죽거리 잔혹사>의 방식을 택하려던 제작진은, 결국 전주 완주군의 토지공사 공터에 오픈세트를 제작했다. 당시 효자동 지리를 비슷하게 재연한 것은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