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서티파이드 카피> (Certified Copy)
●후반작업 중 ●출연 줄리엣 비노쉬, 윌리엄 쉬멜
프랑스의 여배우 줄리엣 비노쉬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쉬린>(2008)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인 중 하나로 카메오 출연을 약속하고 이란을 찾았다. 그녀의 남는 시간을 위해 이스파한(이란의 대표적인 페르시아 유적지)의 여행 가이드를 자처하고 나선 키아로스타미가 여행 중 차 안에서 자신이 겪었던 일이라며 문득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걸 다 듣고 신기해하는 비노쉬에게 키아로스타미가 진지하게 물었다. 이게 실화라는 걸 믿을 수 있겠나. 그녀가 그렇다고 하자 키아로스타미가 다시 말했다. 그런데 그건 실화가 아닐세.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것인가…. 어느 쪽이 진실이건 이 한 토막의 진위 게임으로 키아로스타미는 비노쉬의 흥미를 충분히 끌었고,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면 꼭 출연하겠다는 그녀의 약속을 그 즉시 차 안에서 손가락 도장으로 받아냈다. <서티파이드 카피>의 탄생 일화다.
이탈리아 토스카니 지방의 한 도시 루치그나노. 골동품 가게의 여주인(줄리엣 비노쉬)이 있다. 그리고 “원형성과 진정성이라는 개념은 가짜이며 모사가 원형만큼 훌륭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은 자신의 책을 홍보하기 위해 이 지역을 방문하게 된 영국 작가(윌리엄 쉬멜)가 있다. 두 사람이 주인공이다. 둘은 어쩌다 함께 여행한다. 때로는 작가의 이론 때문에 논쟁도 불사한다. 그러다 신비한 일이 일어난다. 여자는 시간이 지나자 이 작가의 실제 아내인 것처럼 행세한다. 더 이상한 건 작가다. 그도 남편인 것처럼 행세한다. 그들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이것은 병인가, 게임인가, 정체불명의 모사인가. 혹은 정말 그들은 그렇게 되어가는 중인가.
키아로스타미는 현실과 허구, 사실과 가짜가 얽힌 영화적 재배열의 접경에 삶의 진실이 자리한다고 믿는 예술가다. 말하자면 그의 영화 속 모사(copy)의 행위는 공인받은(certified) 것이다. 그러니 성급하게도 <서티파이드 카피>의 내용이 정말 당신이 겪은 실화인지 아닌지 좀 알려달라는 어떤 이의 궁금증에 키아로스타미는 이렇게 철학적으로 답한다. “한 작가나 영화감독이 무(nothing)에서 발명해낼 수 있었던 지구상의 이야기란 없다. 나는 모든 것이 전에 일어났었다고 믿는다. 그렇게 본다면 이 이야기도 내게 일어났던 일이다.” 덧붙여 주목할 만한 건 키아로스타미가 이번 영화에 최초 또는 오랜만에 시도하는 몇 가지다. 옴니버스 참여작 <티켓>을 제외한다면 그가 촬영지로 이란을 벗어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대사는 프랑스어, 영어, 이탈리어 등 다국적 언어가 쓰인다. 한편 1977년 영화 <리포트> 이후 키아로스타미는 처음으로 각본가에게 시나리오를 맡겼다. 누군가는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생애 첫 번째 러브스토리일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예상하는데, 키아로스타미는 역시 그답게 말한다. “보편적인 이야기다. 남자와 여자의 만남. 어떤 점에서는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다.”
키아로스타미가 국내에 정식으로 개봉했던 마지막 영화 <체리향기> 이후 추구했던 건 극단적이고 실험적인 영화들(<텐> <파이브> <쉬린>)이었다. 지금은 잠시 그 흐름에 거리를 두고 과거에 ‘스토리’가 존재하던 영화의 구조를 다시 변주해내려 한다. 그런데 확실한 건 그것뿐이다. 나머지 중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삶의 원형과 모사를 따라 우리가 함께하게 될 이 신비하고 불완전한 여행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하다.
tip 제작 초반에 <서티파이드 카피>의 남자주인공 역을 제안받은 배우 중 가장 놀라운 이름은 이 사람이다. 로버트 드 니로!! 결국 남자주인공 역은 오페라 바리톤 가수 출신에 영화는 처음인 윌리엄 쉬멜이 맡았다. 키아로스타미는 말하기를 “그의 얼굴에 밴 해학, 냉담함, 자신감”을 캐스팅의 이유로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