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어느 늦은 겨울밤, 작업실에서 몇몇 친구와 함께 옹기종기 담요를 둘러쓰고 비디오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복사에 복사를 거듭한 듯 거친 화질과 음질을 구현하는 영화 한편이 시작됐다. 제목은 <시계태엽 오렌지>.
난 당시 건축과 3학년 학생이었다. 뭔가 세상은 건축을 중심으로 흘러간다고 믿었던, 혹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믿었던 시기다. 당연히 영화를 보는 시선도 그랬다. 영화의 얼개와 건축의 프로세스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고, 영화 속 공간이 설계 작업의 원천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훌륭한 영화도 언어의 장벽을 넘지는 못했다. 자막이 없었기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고, 늦은 시각의 압박까지 겹치는 바람에 나는 초반부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환청처럼 빗속에서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문득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갑자기 정신을 확 들게 했던 것은 바로 이 고급주택의 장면이었다. 마치 처참한 강간신을 적나라하게 보이고자 설계한 것 같은 공간. 프레임 안에서 집은 공적 영역에서 사적 영역으로 자연스럽게 흘렀다. 그리고 악동들은 그 영역의 흐름을 붕괴시키며 잔인하게 여인을 유린했다.
돌이켜보면 그땐 뭔가 멋진 설계를 해보고 싶었던 어설픈 열망이 있었다. 좋은 건축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하기엔 여전히 어려움을 느끼지만 적어도 멋진 설계의 한 가지 요소는 ‘사진발’이었다. 영화 속 고급주택은 ‘화면발’이 잘 받았다. 레벨차를 통해 공간이 하나로 엮이는 주택공간에 잠깐이나마 온 이목을 집중하며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10여년이 흐른 지금, 막상 실무에 뛰어들면서 화면발이나 사진발을 잘 받는 건축이 꼭 좋은 공간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걸 느끼는 중이다. 그럼에도 아직도 그 시절 경험했던 화면 속 공간에 대한 기억이 생생한 것은 그만큼 인상이 강렬하게 남았기 때문일 거다. 그리고 1970년대 초에 이미, 2010년의 내가 아직 설계할 수 없는 근사한 집이 지어져 있었음에 대해 여전히 질투를 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