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작으로 <건축학개론>을 준비하면서 영화 속 ‘좋은 공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각자의 방식으로 공간을 활용하고 또 건축가가 등장하는 영화들이 많았지만 대부분 긍정적이기보다 반대의 경우로 작용해 아쉬움이 남았다. 영화를 논하기 전, 한국에서의 집은 본연의 가치를 잃고, 교환가치로만 인정받아왔다. 좋은 벽지가 곧 그 사람의 지위를 말해주는 세상. 왜곡된 가치는 영화에 그대로 적용됐고, 화려한 치장이 곧 좋은 영화 공간으로 받아들여져왔다.
인상적인 공간을 구현한 작품으로 내가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와 <봄날은 간다>를 꼽는 이유는 그래서 명확해진다. 두 작품의 공간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정서가 숨쉰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자고 있는 정원(한석규)의 장면. 햇빛이 비치면서 그가 누워 있는 바닥의 마루 결이 살아 있는 공간. 또 정원이 마당에서 파를 다듬을 때, 하수구로 들어가는 물을 따라잡는 클로즈업 숏, <봄날은 간다>에서 눈 오던 날 상우(유지태)가 은수(이영애)와 눈을 밟던 순간의 부감숏, 아버지(박인환)가 소주 마시는 상우를 격려할 때의 부감숏. 이런 작은 디테일들은 그 공간으로, 그 집으로 가야만 비로소 알 수 있는 본연의 모습이다. 공간을 정서적으로 둔갑시켜서 화면에 오롯이 담아낸 결과, 정원에게 동네는 과거 첫사랑(전미선)과 기억을 떠올릴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하고(<8월의 크리스마스>), 산사에서 자다가 눈 오는 소리에 깨어난 상우가 은수와 만나는 장면(<봄날은 간다>)은 판타지 같지만 관객에게 와닿을 수 있다. 두 남자 모두 지방의 소도시에서 태어났을 것 같은 확연한 인증이 영화 속 작은 곳 하나에도 빠지지 않고 숨어 있다. 영화 속 캐릭터가 어떻게 살아왔나를 공간을 통해서 설정하는, 두 작품은 바로 공간이 캐릭터에 기여할 수 있음을 알려주는 가장 적확한 예다.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을 보면 ‘집, 기억과 이상의 저장소’라고 한다. <건축학 개론> 역시 이런 깨달음에서 출발했다. 그 정서를 다룰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게 나의 지금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