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구도심, 인천역과 청관거리 일부가 이 영화의 중심공간이다. 구도심이라? 화려했던 과거가 연상되지 않는 쇠락한 거리 풍경, 그것은 이 영화의 제작연도인 2001년이나 10년이 지난 현재나 별반 다르지 않다.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에 노출되는 시간의 코드로만 보면 동시대 인천의 공간은 송도를 중심으로 한 경제자유구역의 초반 개발 무드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작은 것들을 돌아볼 여지가 없었던 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의 시선이 인천의 구도심을 향하고 있는 것은 ‘큰 계획’에 대한 조용한 저항의지로 읽혔다. 개봉 초반, 이 영화가 관객 일반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던 것은 설정 인물의 성장소설적 구성이 강하게 다가온다는 인상이 짙었던 까닭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 ‘작은’ 영화는 초반 부진을 털고 세간의 화제작으로 반짝 떠오른다. 이 영화 얘기가 인천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번져 급기야 공직자들이 대거 착석한 가운데 인천에서 재개봉되는 해프닝을 겪는다. 이유는 단순했다. 시민사회나 공직자들이나 영화 속 중심공간으로 인천(의 구도심)이 카메라에 담겨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세상의 가장자리에 머물고 있던 가난한 이웃의 삶의 터를 스크린에 옮겨놓은 감독의 시선이 더없이 중요하다고 본 지역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신도시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던 공직자들의 손을 잡아끌었고, 그들은 이 영화를 통하여 인천 구도심의 재생사업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찾아낸 듯하다. 그러나 시각은 서로 달랐다. 도시재생, 큰 계획이 아닌 작은 계획으로 도시를 재구성하자. 문제는 이같은 생각이 인천 정치판의 대세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영화는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용납하지 않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지만 도시 슬럼의 현장에 눈길을 준 개발주의자들은 속으로 환호했던 것이 분명하다. 인천이라는 도시공간을 부자들의 공간으로 재구축하는 길만이 서울의 위성도시라는 오명을 벗는 유일한 길이라는 확신을 한 듯했다. 그 뒤로 인천은 송도를 중심으로 개발광풍의 최전선에 합류한다. 더이상 마이너리그의 인천은 없다. 그런가? 영화는 인천의 코어와 엣지 사이에서 경계의 아이러니를 절묘하게 잡아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