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나서 가장 긴 자취를 남기는 것은 하나의 장소다. 함께 걸었던 거리, 영화를 보았던 극장, 커피를 마셨던 카페…. 이별 뒤에도 그곳을 지날 때면 무심결에 떠오르는 기억들을 떨쳐버리고자 애를 써야 했던 순간들이 있다. <500일의 썸머>는 바로 그 사랑의 장소들에 관한 영화다. 무엇보다 LA라는 도시의 풍경과 정취, 우리가 잘 몰랐던 LA의 근대 건축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이 영화의 무대인 LA 다운타운은 사실 오랫동안 범죄의 온상으로 악명을 떨쳤다. 이후 2003년 대대적인 재개발 붐이 일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촬영된 최근의 영화들은 주로 웨스틴 보나벤처 호텔이나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같은, 포스트모던 건축의 아이콘이 된 빌딩들을 스크린에 옮기곤 했다. <500일의 썸머>는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모던의 정서와 낭만을 기록한다. 톰과 썸머가 만난 지 95일째 되는 날, 본격적으로 LA 근대 건축의 면모가 소개된다. 아르데코 건축 양식의 푸른 빛이 감도는 이스턴 컬럼비아 빌딩(1930)과 톰이 가장 좋아하는 건축물로 소개되는 파인 아츠 빌딩(1927)의 로마네스크 아치가 전면에 등장한다.
톰과 썸머의 벤치가 놓인 작은 공원인 엔젤스 놀(Angel’s Knoll)에서는 LA 최초의 고층 건물인 콘티넨털 빌딩(1904)이 시야에 들어온다. 톰과 썸머가 영화를 보는 곳은 LA에서도 가장 오래된 극장인 밀리언 달러 극장(1918), DVD를 빌리는 곳은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갖춘 샌 페르난도 빌딩(1906), 톰이 회사 면접을 보는 마지막 장면은 저 유명한 브래드버리 빌딩(1893)에서 촬영되었다. 미래가 아니라 과거, 예측이 아니라 추억, 지성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는 이 애틋한 로맨스영화에서 노스탤지어를 자극하는 모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하지만 이런 목록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사랑의 장소에 관한 한 이 영화의 백미는 109일째, 톰이 썸머의 집을 처음 방문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한다. 세잔의 화집과 마그리트의 중절모와 푸른 사과가 놓인 그 공간. 그날 톰은 썸머와의 사이에 놓여 있던 ‘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고 말한다. 사랑하고 이별했던 우리 모두는, 하나의 벽을 건넘으로써 인생이 바뀌었던 그 순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