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전쟁, 그 포화 속으로
2011-01-11
글 : 강병진
사진 : 백종헌
장훈 감독의 <고지전> 촬영현장
매장된 특수효과용 장비가 터지자 흙더미가 날아왔다. 주위를 돌아보니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배급사 관계자가 전해준 마스크를 왜 안 쓰고 있었는지 후회했다. 겨울의 촬영현장, 특히 야외현장은 마스크와 모자, 등산복이 필수인 듯했다.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찍었다. 함양군 지곡면 보산리 산 61번지. 내비게이션이 가리킨 곳은 길이 아니다. 운전기사님은 “공중에 있는 걸로 나온다”고 말했다. 방향만을 쫓아 달렸더니 ‘<고지전> 촬영현장’이라 적힌 임시이정표가 보였다. 몇개의 이정표를 지나자 가파른 경사길과 길을 둘러싼 황폐한 산이 나타났다. 2010년 12월7일. <고지전>의 56회차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이곳은 함양 백암산의 어느 자락이다. 지난 2009년 4월12일 오후 3시 함양읍과 지곡면에 걸친 백암산 7부 능선에 발생한 산불은 다음날까지 이어져 약 25ha의 산림을 태웠다. 당시 사건을 보도한 기사는 “산불 발생 초기 백암산 인근 지곡면 보산리 보각마을 주변까지 불길이 번져 주민 40여 가구 80여명이 근처 마을로 긴급대피하기도 했으나 다행히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백암산은 지리산국립공원에 속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문장이 국립공원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는 것 같아 애꿎어 보였다.

화마가 휠쓸고 간 백암산 자락에서 6·25를 보다

산을 든든한 병풍삼아 살던 주민들에게는 야속한 일이나, 한국전쟁 당시의 고지전투를 그리는 영화 <고지전>에는 이만한 오픈세트가 없었을 것이다. <고지전>의 연출을 맡은 장훈 감독은 지난 7월 인터뷰 때, 당시 현장을 담은 몇장의 기록사진을 보여주었다. 눈앞에 보이는 산의 모습은 미술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까지도 그 사진 속 고지와 닮아 있다. 타버렸다고 말하기보다는 꺼져버렸다고 말하는 게 맞을 법한 나무들. 뿌리를 박았던 흔적조차 사라진 땅. 연이어 퍼붓는 수류탄과 포탄을 견뎌야 했던 한국전쟁 때의 고지나 화마가 휠쓸고 간 산이나 모습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촬영 전 현장에 와본 장훈 감독은 “사진에서 본 고지의 슬픈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대규모 장비와 인원이 촬영할 수 있는 장소인지 스탭들의 눈치를 봤었다”고 말했다. 제작진이 제일 먼저 시작한 건 토목공사였다. 흙을 쌓아 길을 만들고, 안전을 위해 가드레일을 박고, 그 길을 미술팀이 올라가 삽과 곡갱이로 전쟁 당시의 고지를 재현했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산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경상남도니까 전쟁 때도 조용히 있었을 산이다. 몇 천년간 가만히 있다가 산불이 났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싶더라. 게다가 여기서 우리는 전쟁영화를 찍고 있으니 참….”

현장에서 만난 장훈 감독의 첫인사는 “조심하세요!”였다. 촬영에 쓰일 특수효과 폭탄이 매장된 자리에 서 있었던 탓이다. 돌아보니 폭발이 일어날 지점에는 빨간색 깃발이 꽂혀 있었다. 자리를 못 잡고 있다가 몇몇 스탭에게 연이어 지적을 받았다. 5, 6번의 폭발과 기관총의 화염까지 등장할 이날의 장면은 #.27. 애록고지 탈환 작전을 보여주는 신이다. 애록고지는 영화에서 인민군과 국군이 엎치락뒤치락하며 탈환하려는 고지의 이름이다. 시나리오상으로 볼 때는 강원도 동부전선의 어느 고지로 설정돼 있다. 전주에서 막사 내의 장면을, 화순에서 인민군 저격수의 장면을 찍은 <고지전> 제작진은 약 3개월 전부터 이 산에 올라와 있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밥먹기도 힘들고, 화장실 가기도 힘든 고지 정상에서 촬영을 했다고 한다. 게다가 겨울산에서의 전쟁영화 촬영은 당연히 혹독한 추위와의 싸움을 수반할 것이다. 그러고보니 장훈 감독의 패션도 달라졌다. <의형제>의 메이킹필름 속에서 청바지와 하얀색 셔츠를 입고 모자와 선글라스를 쓴 모습이 꽤 스타일이 있다고 봤었다. 지금 겨울의 현장에서 그는 아디다스 삼선 트레이닝 바지와 점퍼를 입고 있다. 어딘가 동네 형이다.

폭발이 필요한 장면인 만큼 배우들은 리허설을 반복했다. 비명소리는 그때마다 커졌다.

애록고지 탈환 작전 신 _ 폭발, 화염, 그리고 비명

시나리오에 적힌 애록고지 탈환 작전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국군인 수호부대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정면에는 인민군의 기관총이 버티고 있고 하늘에서는 미 공군 인베이더가 폭격을 가한다. 박격포 포격을 신호로 뛰어나간 대원들은 이내 죽어나간다. 고지 아래까지 진입한 이들은 기관총이 숨겨진 토치카를 향해 일제히 수류탄을 던진다. 포탄의 연기에 인민군의 시야가 흐려진 틈을 타, 군인 한명이 토치카로 달려가 수류탄을 투척한다. 이날 공개된 장면은 이 가운데 수호부대원들이 폭격을 맞고 쓰러지며 전진하는 상황이었다. 촬영 시작을 알린 스탭은 배우들에게 “아비규환입니다!”를 반복했다. “포탄이 군데군데 있다고 생각하세요! 비명을 지르거나 위생병을 부르는 목소리도 많아야 합니다!” 3대의 카메라가 동시에 촬영을 준비했다. 장훈 감독의 사인과 함께 폭발이 일었다. 순간 멀찌감치 서 있는 자리까지 흙이 튀었다. 작전이라고는 하나, 사실상 작전이 아니다. 비명과 괴성이 난무하고 대원들이 곳곳에서 쓰러졌다. 공격도 아니고, 후퇴도 아니고 날아오는 포탄에 어쩔 줄을 모른다. 컷 사인이 들리자 스탭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외친 말은 “다친 분 있으세요?”였다. 곧이어 신재명 무술감독의 무전기에 다친 사람이 없다는 무전이 들려왔다. 신재명 감독은 “감사합니다”라는 말로 답했다.

장훈 감독이 모니터 앞으로 배우들을 불렀다. 김수혁(고수)과 강은표(신하균), 양효삼(고창석), 오기영(류승수), 신일영(이제훈), 남성식(이다윗)이다. 모두가 흙 묻은 군복을 입고 먼지로 얼굴을 감싸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고창석과 이다윗이 특히 짠하다. 시나리오를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고창석이 연기할 양효삼은 고향에 아내, 혹은 아이까지 두고 왔을 법하고 이다윗이 분할 남성식은 학교를 다닐 나이에 끌려온 학도병으로 보인다. 현장의 분위기를 띄우는 건, 고창석과 류승수의 몫인 듯했다. 모니터를 하던 장훈 감독이 뭔가를 말하자, 류승수는 “돈 워리 어바웃 잇!, 아이 갓 잇!”이라고 답했다. 잠시 쉬는 시간 동안 배우들은 서로에게 외국식 이름을 붙여주고 있었다. 이다윗에게 어떤 이름을 붙여줄까가 화제였다. 고창석이 정했다. “애가 똑똑하잖아. 빠스칼 어때? 빠스칼?”

고수가 연기하는 수혁은 여리고 소심한 남자에서 점점 기능적인 군인으로 변해가는 인물이다
신하균은 수혁의 오랜 친구이자 그와 함께 고지전투를 겪으며 친구의 변해가는 모습을 목격하는 은표 역을 맡았다.

노인의 손금 같은 지형에서 벌어지는 지옥도

다음 촬영이 준비되는 틈을 타 고지의 윗선에 올라갔다. 멀리 있을 때는 평범한 언덕이었는데, 막상 올라가려들자 다리에 쉽게 힘이 붙질 않는다. #.27로 보면 현재 이곳은 인민군이 점령한 상태다. 올라오기 전 한 스탭에게 이곳에 병사들이 지나다니는 교통호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통나무로 만든 외벽과 지붕이 있고 그 위를 흙으로 덮은 상상 속의 교통호는 없었다. 분명 이 진지에서 저 진지로 뛰어다니는 병사들의 뒷모습을 스테디캠으로 유려하게 담아냈던 여러 전쟁영화의 이미지가 떠올랐을 것이다. 교통호라기보다는 사람들이 수없이 뛰어다닌 탓에 움푹 팼을 법한 길들이 여러 갈래로 나 있었다. 한쪽에서는 미술팀 스탭들이 삽과 곡갱이로 또 다른 교통호를 만드는 중이었다. 이곳에서 보니 산 전체가 주름진 표정이다. 고지의 주인이 수도 없이 바뀌는 <고지전> 속의 전쟁이 그 주름을 닮아 있을 것이다. 류성희 미술감독은 “자료사진에 나온 당시의 지형 자체가 외국의 전쟁영화처럼 교통호가 일직선으로 나 있는 형태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한 고지에서 수십번 전투를 하다보니, 땅 역시 수없이 패고 엉킨 것 같더라. 시가전 같은 전투에 비해 전쟁의 본질적인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상상하게 만들었다. 컨셉을 구상할 때도 노인의 손금 같은 지형, 그곳에서 벌어지는 지옥도의 현장을 생각했다.” 실제에 가까운 고지의 형태는 <고지전>의 촬영과 액션 스타일과도 맞닿아 있다. 신재명 무술감독은 “액션의 효과가 아니라 감정을 먼저 앞세우는 컨셉”이라고 설명했다. “총에 맞았을 때도, 총격의 효과를 보여주려고 일부러 동작을 크게 하는 식의 액션은 없다. 육박전 상황에서도, 싸울 수도 있지만 싸우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상대는 적이지만 누구나 살인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테니까.” 장훈 감독이 밝힌 <고지전>의 영화적 스타일은 “최대한 스타일을 지우는 것”이다. “김우형 촬영감독과도 많은 이야기를 했다. 전쟁영화의 톤이 <라이언 일병 구하기> 이후로 모두 모노톤이 되어버렸는데, <고지전>에서는 당시 한국의 흙 색깔, 하늘 색깔을 구현해보려고 했다. 액션도 최대한 액션영화처럼 보이지 않는 게 목표다. 약간 웃고 약간 슬퍼하면서 가볍게 소비하는 전쟁영화보다는 관객을 당시의 전쟁터로 데려다놓는 영화를 생각하고 있다.”

현장은 분주했지만, 장훈 감독의 목소리는 커지는 법이 없다. 조근한 목소리와 말투로 조용히 현장을 지휘했다.

오후 3시가 넘어가자 해가 산 너머에 다다랐다. 그새 날씨도 추워진다. 고지 아래에 만든 토굴에는 기관총이 설치됐다. 테스트 삼아 발사된 총소리가 꽤 묵직하다. 이제 수호부대원들은 기관총의 사격에 맞아 목숨을 잃거나 사격을 피해 전진할 것이다. 스탭들의 움직임도 바빠졌다. 해가 떠 있을 때는 최대한 찍을 수 있을 만큼 전투신을 찍고, 해가 넘어간 뒤에는 조명을 활용해 인물들의 클로즈업을 촬영할 계획이었다. 정원찬 제작실장은 보통 새벽 5시에 모인 뒤 해가 지면 정리를 한다고 전했다. 다시 촬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많은 포탄이 터졌다. 나무까지 쓰러졌다. 대원들의 비명도 더욱 크게 귓가를 울렸다. 떨어지는 해를 붙잡고 진행된 촬영은 약 30분 뒤에야 끝났다. 조명을 설치하는 스탭들을 바라보다가 산을 내려왔다. <고지전>의 전체 촬영은 약 100회다. 이곳에서의 촬영은 크리스마스 전까지 끝내는 게 목표다. 몇 군데의 지역을 더 거친 뒤, 봄이 오는 2011년 2월 중순 즈음에야 <고지전>의 전투가 끝날 예정이다. 그때가 되면, 불에 타버린 백암산도 자생을 시작할 것이다.

당시의 리얼리티가 가장 중요한 답

장훈 감독

-전체 전쟁으로 볼 때, 지금 촬영 중인 전투는 어느 시점에 놓여 있나.
=초반에 벌어지는 전투다. 이제 본격적인 전투를 시작하는 정도라고 보면 된다.

-고증을 은근히 신경 쓴다고 들었다.
=은근히가 아니라 대놓고 많이 쓴다. (웃음) 처음에 스탭들과 한 이야기가 이런 거였다. 전쟁영화가 정말 많은데 하물며 6·25전쟁은 <태극기 휘날리며>도 있는데, 왜 또 전쟁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 관객 입장에서도 왜 또 전쟁영화를 봐야 하냐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고. 당시의 리얼리티가 가장 중요한 답이더라.

-영화 속 지역으로는 이곳이 어딘가.
=강원도 동부전선 어디쯤일 거다. 어떤 고지를 딱 정한 게 아니라 고지전투를 바탕으로 상징적인 고지 하나를 만든 거다. 실제 전투에서는 2년 동안 한 고지만 놓고 싸우지 않았다더라.

-촬영에 어려운 점이 있나.
=일단 날씨다. 날씨가 흐려야 땅 색깔이 짙게 나오는데 날씨가 맑다고 해서 다음날로 촬영을 넘기기가 어렵다.

-가벼운 전쟁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 했다. 일단 휴전협정 이후에 벌어진 참혹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고지전>은 비극이 예정된 영화가 아닐까 싶다.
=아직은 말할 수 없다. (웃음) 박상연 작가가 써놓은 결말이 나하고 상당히 잘 맞았다. 지금으로서는 진지한 태도를 지키려 한다. 현명하지 못한 방식일지라도 나름의 진심을 드러내고 싶다. 어떤 평가를 받느냐보다도 그런 태도의 여부가 중요하다.

-캐스팅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배우들의 기존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찾으려 한 건 아니다. 기존의 이미지를 심화하는 쪽이다. 고수씨는 첫인상이 매우 건강하고 바른 청년이었다. 수혁을 위해서는 조금 망가뜨리는 게 내 숙제였다. (웃음) 신하균 선배는 사람이 정말 좋더라. 진짜 양반이다. (웃음) 상대방에 대한 리액션이 좋고 많이 이해해주는 분이다. 은표라는 캐릭터 자체가 액션보다는 리액션이 많다. 관찰자인 분위기가 있는데, 하균 선배가 바라보는 태도가 너무 좋더라.

-김옥빈은 어떤가. 처음으로 시도하는 본격 여성캐릭터다.
=안 그래도 촬영할 때마다 내가 긴장한다. 역시 내가 여자배우에게는 서툰 것 같다. 가끔씩 오니까 챙겨주려고 하는데, 그게 어색하다. (웃음) 다행히 옥빈씨가 매우 털털하더라. 운동신경이 워낙 좋아서 액션도 잘 소화하고 있다.

-여성캐릭터가 있지만 <고지전>이 전쟁영화인 이상, 전작들에서 이어져온 남자영화의 끝인 것 같다.
=영화를 찍으면서 내가 남자영화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된 것 같다. 의식하거나 의도했던 건 아니다. 내 성격상 그게 편한 것 같다. 지금까지 남자들의 숫자가 점점 늘었는데, <고지전> 다음에도 남자영화를 하려면 아마 스포츠영화를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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