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옥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연희동 주택가 골목의 한 이층 양옥집. 인적 드문 동네 분위기 때문일까, 체감기온 영하 20도라는 강추위 때문일까. 대문을 열자 눈앞에 들어오는 넓은 앞마당이 휑하다. ‘집은 주인을 닮는다’는 말처럼 이 집은 왠지 쓸쓸한 사연을 간직한 듯 보인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찾은 이곳은 민규동 감독의 신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주요 공간이다.
썰렁한 앞마당과 달리 현관문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화장실 앞은 십수명의 스탭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카메라 세팅하랴, 조명 수정하랴 정신없는 와중에 두 배우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비롯해 가족을 챙기는 데 일생을 다 바친” 엄마 인희 역을 맡은 배종옥은 차가운 화장실 안에서, 딸 연수를 연기하는 박하선은 따뜻한 거실에서 각각 따로 감정을 준비하고 있다. 이날 공개된 신은 암에 걸린 엄마가 화장실에서 고통스러워하는 광경을 딸이 처음으로 바라보는 장면이다. 엄마의 신음이 그 어느 때보다 귀에 크게 들어오고, 거실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까지의 거리가 평소보다 훨씬 멀게 느껴지는 등 그야말로 딸의 일상에 낯선 공기가 침투하는 순간이다.
자신을 옥죄어오는 아픔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딸을 걱정시키지 않으려는, 복합적인 감정을 요하는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배종옥은 “그다지 힘든 연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연기 베테랑인데다가 전체 분량의 2/3 정도가 진행된 만큼 그가 극중 엄마가 다 됐기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배종옥은 “등장인물이나 시나리오가 일상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라면서 “병에 걸렸다는 설정 때문에 특별하게 (연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오히려 더 평범하게, 일상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질병 자체가 이야기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병을 통해 일어나는 삶의 작은 파장이 가족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느꼈으면 한다”는 감독의 의도와 맞닿아 있다.
엄마의 투병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의사이면서 아내의 병 하나 빨리 발견하지 못한 데 대해 자책하는” 아버지(김갑수), “치매에 걸렸지만 엄마의 유일한 대화 상대인” 할머니(김지영), “철부지 남편 때문에 고생하는” 남동생의 아내(서영희), “매번 누나한테 손 벌리고, 아내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철부지 남동생”(유준상), “미대에 가고 싶지만 아버지 때문에 의대를 지원하는 재수생” 아들(류덕환), “유부남과 사랑에 빠져 괴로워하는” 딸(박하선) 등 가족은 엄마의 고통을 차례로 알아간다. 그리고 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준비한다. 영화는 2011년 상반기 개봉예정.
원작에 대한 강박? 없다!
민규동 감독
“몸을 부대끼며 살아야 해.” 촬영장에서 영화 마케터와 스탭들이 자신의 트위터를 서로 팔로하는 광경을 보자마자 민규동 감독이 한마디 던진다. 이 말이야말로 감독이 ‘병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엄마로 인해 겨우 주위를 둘러보게 되는’ 주인공 가족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닐까. 현장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는 민규동 감독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에 관한 이모저모를 틈틈이 물어봤다.
-오늘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다. 현재 기온이 시나리오상 시간 배경인 늦가을을 앞질렀다.
=거의 순서대로 찍고 있다. 지금 찍는 신은 오늘처럼 딱 연말이 시간 배경이다.-정철(김갑수)이 화장실에서 피를 토하는 아내 인희(배종옥)를 부둥켜안고 우는 장면을 힘들게 찍었다고 들었다.
=컷 분할 없이 롱테이크로 한번에 가는 장면인데,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서 정철이 피를 토하는 인희를 부둥켜안고 함께 울부짖는 어려운 연기였다. 죽음을 맞닥뜨리는 순간인데, 그 순간을 표현하는 게 힘들었다. 한 배우는 연기가 더이상 나오지 않아 다음에 찍자고 하고, 또 다른 배우는 감정이 안 잡히지만 끝까지 해보겠다고 했다. 워낙 연기를 잘하는 배우들이라 그동안 수월하게 찍어왔는데, 처음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든 장면이었다.-다섯 번째 장편영화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을 선택했다. 시기적으로, 혹은 개인적으로 어떤 이유가 있나.
=정답은 딱히 없다. 많은 작품을 쓰고 준비하지만 원하는 시기에 만들어지는 영화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때로는 사소함이 작품 선택에 작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극한적으로 큰 사람이나 주변 친구들의 죽음이 많았다. 예전에 촬영할 때 외할머니께서 암으로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잘 가라’, ‘그동안 고마웠어’라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떠났는데 장례식장으로 바로 달려갈 수 없었다. 내가 빠지면 촬영 진행에 큰 차질이 빚어지고, 영화 예산에 큰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에서였다. 무엇보다 그때는 ‘영화가 인생의 그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뒤늦게 장례식장을 찾았다. 온 가족과 친척들이 오열하고 있는데, 정작 나는 눈물이 나오지 않더라. 원래 상황이 닥치면 우는 편이라…. 이후 누군가가 영화는 인생의 저 뒤에 있는 거라고 하더라. 또 영화란 원래 익숙한 이야기를 하는 거라 새로움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얘기도 함께 들었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도 익숙하고 빤한 이야기일 수 있는데, 이 안에서 새로움을 찾으려고 한다. 그 점에서 이 영화를 내놓고 나면 개인적으로 많이 달라질 것 같다.-원작인 노희경의 단막극보다 가족 캐릭터에 더 집중한 느낌이다. 노희경 작가가 꽤 만족해했다고.
=어느 정도 바뀌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들 정수, 딸 연수가 가진 욕망과 현실이 드라마상에서 더 드러났으면 했다. 애들은 애들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자신이 욕망하는 것을 추구하는 등 가족 각자의 삶이 노골적으로 드러나길 원했다. 그런 과정들을 엄마가 다 알게 되고 서로 부딪히면서 더 큰 짐을 짊어지게 된다. 동시에 서로의 고통을 해소하고 함께 나누는 모습도 보여주려고 했다. 이처럼 가족 구성원 사이에 장애물을 설정하다 보니 할머니와 인희의 남동생 근덕 캐릭터가 많이 바뀌었다. 할머니는 극중 유일하게 인희의 마음을 알아주는 인물로 변했다. 이를 통해 딸이 없는 시어머니와 어머니 없이 자란 며느리가 나누는 애정을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었다. 근덕은 폭력적인 면모가 분명히 있지만 마초라고 하기에 한끗 모자란 인물이다. 유준상 선배가 연기하면서 제대로 살아나더라. 어쨌거나 원작에 대한 큰 강박감은 없었고, 어떻게 하면 원작과 다르게 보일까도 딱히 노력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야기에 대한 내 요구와 생각이 가진 접점을 찾으려고 했다는 것이다.-부부 역할을 맡은 배종옥, 김갑수뿐만 아니라 다른 배역들도 저마다 화려하다.
=화려하나?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웃음) 할머니 역을 맡은 김지영 선배님은 드라마 버전의 김영옥 선생님과 확연히 다르다. 덩치도 더 크시고. 근덕의 아내 선애 역을 맡은 서영희씨는 개인적으로 친해서 시나리오도 안 보여주고 캐스팅했다. ‘할 거면 시나리오 주고, 안 할 거면 안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함께 부부로 출연하는 유준상 선배와 정말 잘 어울리더라. 나중에 알고 봤더니 대학 선후배인데다가 평소 호감을 가지고 있던 관계였다. 서영희는 ‘나중에 결혼하면 유준상 선배 같은 남자와 하고 싶다’고 말할 정도였다. 덕분에 두 사람은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아들 정수 역의 류덕환은 술자리에서 종종 만나는 정도였는데, 실제로 친할머니와 함께 사는 류덕환의 개인사가 정수 캐릭터와 닮아서 캐스팅했다. 딸 은수 역의 박하선씨는 전수일 감독의 <영도다리>를 통해 처음 접했다. 나중에 드라마에서 인현왕후로 나온 것을 봤는데, ‘<영도다리>의 그 친구’였다는 게 한눈에 들어오더라.-극중 인희가 앓고 있는 병은 온몸을 휘감고 있다. 단순한 질병 묘사라기보다 가족의 갈등이 일상을 조금씩 뒤흔드는 이야기의 내용과 맞물려 있다.
=질병 자체가 서사를 끌고 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엄마가 앓고 있는 병이 가족의 삶에 어떤 파장을 일으키는지, 또 그것을 통해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보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