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나의 심장을 뛰게 한 이야기다
2011-01-11
글 : 강병진
사진 : 백종헌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

지난 12월22일, 군산의 어느 한정식집. 약속한 시간이 되자 트레이닝복을 입은 강제규 감독이 미닫이문을 열었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약 6년 만이다. 지난 2006년 미국으로 떠나 할리우드 데뷔를 준비했던 그는 오랜 시간 공들였던 과제를 잠시 미룬 뒤, 신작 <마이웨이> 제작을 발표했고 지난 10월부터 촬영에 들어갔다. 데뷔작인 <은행나무 침대>부터 <태극기 휘날리며>까지. 강제규 감독이 연출한 3편의 전작들이 장르, 테크닉, 규모, 그리고 시장 크기에서 확장을 시도했다면, <마이웨이>는 그가 추구한 ‘확장’의 키워드를 더욱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가 될 것이다. <마이웨이>는 노르망디 해전 당시 미군 포로가 된 어느 한국인 독일군에 관한 실제적인 근거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일본군에 징집된 조선인이 중국을 거쳐 소련으로, 소련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노르망디로 흘러가게 된 여정, 그리고 그의 운명을 함께 따르는 일본인 친구와의 이야기가 기본적인 골격이다. 작품마다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그가 현재 상상하고 있는 밑그림은 무엇일까. <마이웨이>와 4년간의 할리우드 생활, 그리고 강제규의 ‘My Way’에 대해 물었다.

-<마이웨이> 촬영은 얼마나 진행됐나.
=45, 46회차 정도 될 거다. 첫 촬영이 10월15일이었다. 원래는 2010년 6월에 크랭크인하려고 했었다. 그때는 새만금이 아니라 중국에서 찍으려고 했었는데, 내가 시나리오를 가지고 헤매는 바람에. (웃음) 몽골에서 벌어지는 전투가 있는데, 초원을 배경으로 해야 해서 대안을 찾은 게 여기였다. 이곳 촬영이 끝나면 합천에 가서 경성 장면을 찍을 계획이다. 유럽쪽 촬영은 제일 마지막에 진행할 거다. 그게 노르망디 전쟁인데, 현재 발트해쪽에서 세트 공사에 들어갔다.

-어제 SBS에서 방영했던 다큐멘터리 <노르망디의 코리안>을 봤다. 워낙 많은 지역을 넘나들고 있더라. <마이웨이>도 거의 그만큼 다녀야 할 것 같다.
=너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사신 분이라 영화도 파란만장하다. 경성, 몽골, 러시아, 독일, 프랑스…. 로케이션해야 할 장소도 그만큼 다양하다. 시나리오 리허설을 할 때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가 나왔다가 독일어, 영어까지 나오는데, 상당히 재밌는 풍경이었다. (웃음)

-실화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나.
=3년 반 전인가. 미국에 있을 때 워너브러더스 관계자에게 연락을 받았다. 김병인씨가 쓴 영문 시나리오가 이미 나와 있었다. 워너쪽에서 연출자를 물색하다가 나한테 연락이 온 거다. 그 이후로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 지금은 워너도 빠진 상태다. 시나리오를 볼 때만 해도 영화로 만들 만하겠다는 생각을 한 정도였다. 그러다가 좀전에 이야기한 다큐멘터리를 나도 보게 됐다. 다 보고 나니 심장이 벌렁벌렁하더라. (웃음) 거대한 역사 속에 함몰되어가는, 그러나 결코 함몰되지 않는 인간의 이야기랄까. 그런 점에 매료됐다.

-장동건이 연기할 주인공 외에 그의 친구인 일본인 캐릭터가 있다.
=그건 초고에서 이미 설정된 부분이었다. 그 시대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에 놓인 두 청년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드라마가 진행되어갈수록 일본인 청년조차 그가 원치 않는 새로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게 된다. 두 남자의 여정을 통해 그들이 겪는 증오와 대립과 갈등, 그리고 서로 이해하고 용서해가는 과정을 보게 될 거다.

-장동건과 오다기리 조가 캐스팅됐다. 스타성 외에 어떤 점을 보았나.
=개인적으로도 다 좋아하는 배우다. 두 인물이 한 화면에서 연기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두 배우 외에 몽골에서 장동건과 적으로 만나는 인물로 판빙빙이 나온다.

-<마이웨이>의 제작비는 <태극기 휘날리며>의 두배 정도 되는 거 아닌가.
=물가 상승률을 따지면 꼭 두배라고는 할 수 없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140억원 정도였다. 사실상 그때도 140억원으로 찍을 수 없는 영화를 140억원에 찍은 거였으니까.

-어떤 스타일로 전쟁을 묘사할 계획인가.
=그건 영화를 보면 알 거다. (웃음) 모든 전쟁이 다 같을 수는 없지 않나. 전쟁의 유형, 시간, 배경, 계절, 그리고 목적도 다르다. 디테일한 변별력을 만들지 않으면 비슷하게만 보일 수 있다. <마이웨이> 속 전쟁과 전투의 변별력은 무엇일까가 시나리오를 쓰면서 가장 많이 고민한 부분 중 하나였다. 지금은 어느 정도 변별력을 찾은 것 같다.

-촬영은 누가 하나.
=이모개 촬영감독이 한다. 같이 작업하는 게 재밌다. 호흡이 잘 맞는다. 미감을 끌어내는 본능과 드라마의 키워드를 놓치지 않는 논리가 잘 버무려진 촬영감독이다.

-다시 전쟁영화를 하는 게 부담스럽지는 않았나.
=정말 다시는 안 하려고 했다. 전쟁영화, 정말 힘들다. 도시에서 찍고 싶었다. 하루 촬영이 끝나면 집에도 갈 수 있게 말이다. (웃음) 전쟁영화를 찍을 때는 유랑극단 같은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악천후와 싸워야 하고 고상하게 식당에 앉아서 밥먹는 건 상상도 못한다. 하루에도 몇명씩 부상으로 병원에 실려간다. 실제 전쟁터와 다를 게 없다.

-<마이웨이>와 강제규 감독에게 기대하는 건 역시 산업 전체에 어떤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올 것인가다. 그동안 만든 작품이 모두 당시 영화산업을 재편성시키는 계기를 마련했기 때문이다. 한편, 그때와 지금은 시장 상황이 상당히 달라졌다.
=글쎄, 잘 모르겠다. 한국영화가 앞으로 어떤 방향성을 가질 것인지, 아시아영화가 또 어떻게 확장될지에 관한 고민일 것 같다. 지금 한국영화시장이 포화라고 가정했을 때, 이 상황에서도 누군가가 그 파이를 잠식해 들어올 수 있는 거다.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 내년 9월이면 영화 수입쿼터를 공식적으로 해제한다는데, 이건 사실상 시장자율화를 의미한다. 또한 중국영화의 족쇄였던 심의규정도 완화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중국의 영화시장은 거대한 자본력과 자유로운 소재개발로 단기간에 진화할 거다. 그때가 되면 한국영화계로서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이제 어떤 방향성을 가져갈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마이웨이>는 그런 답을 찾아가는 수많은 방법 중 한 가지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

할리우드 데뷔… 데뷔작이 졸업작이 되지 않도록

-할리우드에 간 게 2006년이다. 그동안 한국 영화인들에게 빨리 신작을 내놓으라는 재촉을 많이 받았을 텐데.
=영화 찍기 싫은 감독이 어디 있겠나.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나의 결벽증 때문이다. 코미디를 제외한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제의받았다. 내 에이전트를 통해 장르와 규모 상관없이 드라마에 집중해달라고 요청했었다. 하지만 마음을 움직인 작품이 없었다. <마이웨이>는 아까 말했듯이, 그 다큐멘터리를 본 순간 가슴이 떨려왔다. 바로 한국에 전화해서 이거 무조건 해야 한다고 했을 정도다. 그 정도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영화를 만들 수는 없지 않나.

-SF영화인 <요나>를 준비했던 걸로 알고 있다.
=당시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제작을 기피했던 미들 버젯 속에 <요나>가 있었다. <요나>의 내용 또한 스튜디오의 입맛에 딱 맞는 맞춤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거기다 프로듀서와 작가의 선택도 적절치 못했다. 그들도 날 감동시키지 못했지만 나도 그들이 먹고 싶은 걸 시의적절하게 주지 못한 거다. 아무래도 나더러 연출하지 말라는 이야기였나봐. (좌중 웃음) 뭐 어쨌든 기회는 열려 있는 거니까, 언젠가는 좋은 시나리오를 만날 거라고 본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두편 정도는 그들이 원하는 영화를 연출하고 그 다음 기회를 노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데뷔작이 동시에 졸업작이 되는 걸 원하지 않았던 거다. 미국에 얼마나 많은 감독이 있나. 한국 사람인 내가 전형적인 미국영화를 찍는다고 했을 때 언어와 문화에 대한 식견과 이해도 등등을 감안한다면 그들보다 잘 찍을 가망성은 별로 없다. 내가 만약 특별한 변별력이 없는 평범한 할리우드영화를 찍었다면 데뷔작이 졸업작이 됐던 수많은 유럽 감독과 그외 아시아 감독들의 전철을 밟았을 거다.

-그 시간 동안 한국영화계에는 위기론이 대두됐다.
=난 그게 이해가 안됐다. 위기로 보지 않았다. 그동안 영화를 잘 못 만들었거나 좋은 감독이나 프로듀서가 없었기 때문인가? 그들은 위기라 불리는 시기 이전에도 있었고, 당시에도 있었다. 오히려 좋은 인력은 더 풍부해졌지. 정부가 펀드를 만들고 영화산업을 육성하는 과정에서 자본이 많아졌고, 그러다보니 무절제한 기획들이 생겼기 때문에 온 부작용일 뿐이었다. 난 지금이 한국영화산업이 정상화되어가는 시기로 본다. 다만, 시장의 흐름이 건강하게 경쟁하고 상호 견제하는 흐름으로 가야 한다는 전제로 보면 우려가 있다. 힘의 균형이 과도하게 편중되면 또다시 시장의 부작용이 생길 거고, 그것은 곧 콘텐츠의 부작용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강제규 필름을 디렉터스라는 이름으로 재편했다. 여기에 김용화 감독이 함께 참여했다. 현 시장상황에 대한 나름의 복안이 있었나.
=특별한 생각을 가진 건 아니었다. 일단 혼자서 하려고 하니 외로웠다. (웃음) 일을 하다보니까 결국은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게 즐거울 것 같더라. 할리우드에서는 감독과 프로듀서의 결합을 중요하게 보는데, 한국의 현실에서는 뜻이 비슷한 감독들이 조금 더 많이 교감하고 많이 생산성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해 보였다.

-과거와 비교하면 상당히 큰 변화일까.
=외로움을 아는 나이가 됐나 보다. (웃음) 시대를 움직이고 세상을 감동시키는 독창성은 창작의 융합을 통해 가능하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늘 혼자서 쓰고 기획하고 연출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분명한 변화다.

-<마이웨이>는 2011년 12월에 개봉예정이다. 벌써부터 궁금한 건 <마이웨이> 다음 신작은 또 몇년 뒤에 나올까다.
=누가 알겠나. <요나>는 따로 계속 진행 중인데, 만약 그것에만 목매어 있으면 또 5년 영화 못 찍을지도 모른다. 할리우드에서 느끼고 배운 것 중 하나가 있다. 감독이든 프로듀서든 이른바 잘나가는 사람들은 적게는 5편에서 많게는 10편 정도의 프로젝트를 쥐고 있어야 한다는 거다. 영화마다 시기가 있다. 아무리 좋은 시나리오도 시기가 맞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만약 하나의 프로젝트만 들고 있으면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나 역시 다양한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동시에 과거에 비해 훨씬 열린 눈으로 다른 작가들의 시나리오와 기획들을 면밀히 들여다보고 있다. 내 중심적인 기획에서 다자간 기획방식으로 변모하고 있는 셈이다. 요즘 주변 동료들에게 소문내고 다닌다. 2년에 한편씩 할 테니까 도와달라고. (웃음)

-<은행나무 침대>부터 <마이웨이>까지. 영화의 규모가 계속 커졌다. 앞으로도 그럴까.
=사실 규모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다. 중요한 건 스토리다.

-그렇다면 과거의 행보는 어떤 연유였을까 궁금하다.
=글쎄,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동시대를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이나 의미를 주고 싶다는 걸 거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데, 나한테는 어떤 다른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다. 강제규라는 사람이 한국영화를 하면서 아시아의 영화감독으로서 어떤 기능과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나와 내 영화를 통해 한국와 아시아의 영화가 진보하는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증이 계속 있었던 것 같다. 내게 그럴 능력이 있는지도 따져볼 일이지만 스스로 해방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자간 기획방식에 관심 많아졌다

-<마이웨이>가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나.
=제목도 ‘마이웨이’고, 대규모 전쟁에 엄청난 서사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어쩌면 따분한 느낌으로 다가갈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2시간30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만큼 흥미진진하고 감동적인 영화를 찍고 싶다. 그게 내가 영화를 만들면서 계속 놓치고 싶지 않은 끈이다. <은행나무 침대>가 개봉하던 날, 관객 한명이 팝콘을 사서 극장에 들어갔는데, 처음 한알 먹고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하나도 못 먹었다고 하더라. <마이웨이>도 첫 장면에서 마지막 장면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는 영화가 되기를 바란다.

-시간이 흐르고 노년이 됐을 때 어떤 영화를 찍게 될지 상상해봤나.
=음,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 참 부럽다. 그의 영화는 진지하지만 유쾌하고 힘이 넘친다. 현란한 수사를 쓰지 않지만 시대를 뛰어넘는 감각이 있다. 그 나이 될 때까지 관객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감독이길 원한다. 결국 영화감독은 끊임없이 새로운 시대와 장르를 만나면서 발전해야 한다. 5년 전에 만든 영화와 5년 뒤에 만든 영화를 비교할 때 아무런 발전이 없다면 그게 직무유기다. 영화는 특정 세대만 보거나 만드는 게 아니다. 70대 감독과 20대 감독이 함께 활동할 수 있는 다양성이 영화의 생명이다. 한국영화에는 그런 다양성이 부족하지만 좀더 성장하면 그런 시기가 올 거다. 나 역시 오랫동안 영화 속에서 놀고 영화 속에서 자유롭고 싶다.

노르망디의 조선인은 실제 인물인가?

시작은 독일 군복을 입은 어느 동양인의 모습이 담긴 한장의 사진이었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이 사진은 한 2차대전 관련 사이트에 올라와 네티즌의 관심을 끌었다. 이 사이트의 주인장은 미국의 역사학자 스티븐 앰브로스가 쓴 <D-DAY>에서 사진 속의 동양인이 한국인일 거란 근거를 발견했다고 전했다. 책 속의 구절은 다음과 같다. “노르망디 상륙 작전 당시, 유타해변에서 미 1010 공수여단 로버트 브루어 중위는 독일 군복을 입은 4명의 동양인을 생포했다. 아무도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은 한국인으로 밝혀졌다.” SBS는 지난 2005년 12월, 2부작 다큐멘터리 <노르망디의 코리안>을 통해 사진 속의 남자를 추적했다. 당시 몽골의 노몬한에서는 소련과 몽골의 연합군 대 일본군의 전쟁이 있었고, 이때 일본군에 징집됐던 몇몇 조선인이 포로가 돼 소련으로 끌려갔다.

그들 중 일부는 다시 소련군을 위해 전쟁에 참여했고, 이들 중에는 모스크바에서 벌어진 독일 대 소련의 전쟁을 통해 독일의 포로가 된 조선인이 더러 있었다. 제작진은 당시 소련군 포로들이 모여 있던 독일 수용소로 향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포로명단에 있는 조선인의 사진과 이름을 찾아낸다. 노르망디의 조선인이 실제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지만 일본군으로 징집된 조선인이 소련을 거쳐 독일에 이르렀을 거란 가설에 대해 나름 충실한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이후 노르망디의 조선인에 관한 가설은 연극, 소설로 극화됐다. 조정래 작가의 소설 <오, 하느님>도 이 가설을 소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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