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수 감독의 일곱 번째 작품 <돈의 맛>은 이르면 2월 말, 늦어도 4월경에는 촬영에 들어가게 된다. “<처녀들의 저녁식사> <눈물> <바람난 가족>을 만들고 나서 <그때 그사람들>을 만들었을 땐, 물론 개봉 당시 잘리면서 망가지긴 했지만, 예전 세 작품과 다른 어떤 야심이 있었다. 이번 작품도 <오래된 정원> <하녀>를 넘어서는 야심을 갖고 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임상수 감독의 자신감만큼이나 아주 간략한 시놉시스만으로는 대체 어떤 종류의 에로틱-서스펜스-러브스토리가 펼쳐질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필름파말(Filmpasmal). 임상수 감독이 직접 차린 영화사 이름이다. ‘pas mal’은 ’나쁘지 않다’라는 뜻이다. 프랑스에 머무를 때 후딱 지은 이름이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임상수 감독의 영화들이 불러온 파장을 생각한다면, <돈의 맛>이 그렇게 ‘중간’만 갈 리 없다.
-<돈의 맛>은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칸국제영화제에서 일정을 마치고 <하녀>의 프랑스 배급사 프리티픽처스쪽 사람과 저녁을 먹으면서, “다음 영화 벌써 있다. <하녀>의 확장 버전인데, <하녀> 같은 분위기에 섹스신이 훨씬 많고 살인사건도 하나 있다”고 했더니 바로 “내가 산다”고 하더라. 낄낄거리고 웃었는데 농담만은 아니었다. 칸 이후로 내내 영화제들을 다녔는데 비행기와 호텔 방에서 계속 시나리오를 썼다. <하녀>는 의도적으로 캐릭터를 극소화해 부잣집 핵가족을 배경으로 했지만, 이번엔 부잣집 대가족의 계보를 다 다룰 거다. 할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들, 딸, 하녀들.
-<하녀>에선 극소화된 캐릭터로, 어떻게 보면 우화 같은 느낌의 영화를 만들었다. 혹시 거기서 불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걸까? 가족의 확장은 사건의 확장을 뜻할 텐데.
=김기영 감독님의 <하녀>의 리메이크엔 분명히 한계가 있었고 미진하다는 생각을 했다. 발자크적이라고 해야 하나, 셰익스피어적이라고 해야 하나. 이야기꾼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싶다는 욕망도 있다. <바람난 가족>이나 <그때 그사람들> <하녀>를 통해 개인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답답한 사회를 주로 그렸다면, <돈의 맛>에선 암울한 사회에서 정말 아름답고 행복한 인생은 불가능하냐는 질문에 대한 정면대결로 갈 거다.
-아름다운 인생이란 돈에 휩쓸리지 않음을 뜻하는 건가.
=돈에 휩쓸리지 않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웃음) 하지만 그렇게 살 수밖에 없다는 건 어떻게 보면 모욕적인 인생이다. <하녀> 역시 그런 모욕에 관한 영화였다. 좀더 확장시키면 한국에서 ‘하남(男)’으로 산다는 것,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충분한 부자가 아닌 아시아인으로 산다는 것 역시 모욕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 모욕 대신 아름다움은 정말 불가능한가에 대한 답을 내리고 싶다.
-미국인 비즈니스맨 로버트, 그리고 필리핀에서 온 하녀 에바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하녀>의 수직구조를 보면 집주인, 그의 아내, 그의 장모, 하녀 병식, 하녀 은이로 이뤄져 있다. <돈의 맛>이라는 확장된 버전에선 집주인 위에 백인이 있고, 한국 고용인 밑에 필리핀 하녀가 있는 거다. 하지만 그 하녀가 대단히 지적이고 공부도 많이 했고 영어도 잘하기 때문에 좀 다른 문제들이 발생한다.
-한국영화에서 장르가 무엇이든지 간에 돈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영화가 거의 없다. 부자, 재벌에 대한 이야기는 매일같이 언론에 오르내리는데도 말이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도 원하는, 사실 모욕의 근원일 수도 있는 그것을 정면으로 다루고 싶은 거지.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그렇게 자신들의 욕망을 정면으로 다루면 좀 불쾌해하지 않나. (웃음)
=안 그래도 <하녀>를 만들면서 반성을 했다. 난 왜 이렇게 사람들을 불쾌하게 만드는 걸까. (웃음) 어떤 영화를 봤을 때 재미없다고 하면 그냥 잊고 만다. 그런데 내 영화를 보고 나면 재미가 없진 않은데 불쾌하다, 그래서 화가 난다는 반응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게 나와 내 영화가 가지는 어떤 특성일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업영화감독으로서 꼭 그렇게 불쾌하게만 만든다면 곤란해지지. (웃음) 상업영화감독으로서 정면으로 다루는 태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대중과 함께 더 나아갈 수 있는게 뭘까, 했을 때 아름다운 인생이 불가능하냐는 질문에 아름다운 사랑이 끼여들 수밖에 없더라. 내 영화가 가졌던 한계, 어떤 관객을 불쾌하게 만들었던 그 한계를 넘어서고 싶은 욕망이 있다.
-남자주인공 이름이 영작이다.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바람난 가족> <오래된 정원>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름인데, 어떤 연관성이 있는 걸까.
=글쎄, 작명하기가 귀찮아서 그렇다. (웃음)
-그럼 여주인공 나미는 어떤가. <하녀>를 본 사람이라면 그 집 딸 이름이 나미였음을 기억할 것이다.
=나미는 연결된다. 그 딸이 그 딸 맞다. 이 대사가 완성본까지 살아남을진 아직 모르지만, 나미가 ‘어렸을 때 우리집에서 자살한 하녀’ 얘기를 하는 장면이 있다. 이 대사가 살아남는다면, <하녀>의 모호한 결말에 대한 온갖 난리를 잠재울 수 있는 답변도 될 수 있다.
-<하녀> 인터뷰 당시, 나미는 분명히 괴물이 될 거라고 말한 적이 있다. <돈의 맛>의 나미가 결국 그렇게 되었나.
=그 인터뷰를 하고 바로 칸국제영화제에 갔는데, <하녀>의 김홍집 음악감독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받았다. 인터뷰를 그따위로 하면 어떡하냐고. (웃음) 스포일러일뿐더러 난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내용인즉슨, “그날 나미가 본 건 아버지의 돈에 굴복하지 않는 은이라는 여자다. 그러므로써 나미는 그순간 은이의 유산한 아이를 대신하게 된다. 난 나미에게 어떤 희망을 봤다.” 깊이 생각했다. 김홍집 감독의 말이 더 멋있는 것 같고(웃음), 더 좋은 해석인 것 같다. 나미가 아버지의 돈에 굴복하지 않는 은이를 머리에 입력시키고 살았다면 그 집안에서 힘든 인생을 살았을 거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대를 넘어 진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집에서 태어났지만 엄마나 아빠, 할아버지가 살던 대로가 아닌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영화에는 현실에 대한 강한 선호가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런 부를 그린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의 리얼리티를 기대할 수도 있나. (웃음) TV드라마에 매번 등장하는 재벌은 정형화된 클리셰에 가까운데.
=우리는 책을 보든 영화를 보든 항상 새로운 것을 소개받게 된다. 미국영화를 보는 것도 남의 이야기를 들여다보는 경험이잖아. 그런 순간, 그 세계를 잘 모르는 관객한테도 설득력있게 다가오느냐 아니냐가 중요해진다. 이를테면 “<하녀>에 나오는 부자들이 진짜로 저래? 임상수 가봤대?” 이런 질문이 나온다면, 그거야말로 작가의 실력이다. 얼마나 오래 생각했느냐, 관찰했느냐, 실제로 가봤느냐가 연결된 작가의 실력이라고 생각한다. 가봤든 안 가봤든, 설득력있게 진짜처럼 그릴 수 있어야 한다. <하녀> 때 좀 부당하다고 느꼈던 반응 중에, 내가 부자를 못됐게 그렸다는 것이 있었다. 절대 그러지 않았다. 아주 공정하게 그리려 애썼을 뿐이다. 한국에서 부자 이야기를 할 땐 항상 없는 사람 입장에서 혹은 좌파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다루는데, 사실 그런 식의 접근은 재미가 없다. 왜냐하면 현실적으로 그 사람들은 그 사람들의 입장이 있고 자기에 대한 평가도 있으니까. 함부로 씹기는 쉽지만, 그게 실제와는 거리가 멀어진다고 생각한다.
다 함께 불행한 이 삶에 대해
-부잣집에 들어가게 된 가난하고 똑똑하고 야망있는 청년이라는 설정은 TV드라마에서 자주 본 설정이다. 거기에 대한 선입견도 분명히 있을 것이고.
=사실 말로 하면 다 클리셰다. 똑똑하고 야심찬, 그러나 평범한 청년과 재벌집 딸 사이의 러브스토리. 말로 하면 그렇지만, 클리셰스럽게 찍는다면 임상수가 아니다. (웃음) 내가 누구를 공격한다든지, 시니컬하고 태도가 좀 불량하다는 식의 시선들이 있다는 걸 안다. 음… 난 나를 포함해서 한국인의 매일의 삶이 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왜 불행한지 생각해보고 불행해지지 말아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좀더 부자가 되면, 한국사회가 좀더 잘살게 되면 이런 불행이 없어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 같다. 아마 그래서 2007년 이명박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겠지. 하지만 그게 아닐 수 있다. 우린 어쩌면 지금보다 돈을 더 벌 가능성이 없다. 우리의 불행은 내가 내 모습대로 살 수 없고 모욕적으로 살아야 하고 내 자존감을 버려야 하는 경우가 일상에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그런 상황을 많이 겪기 때문에 그러려니 체념하는데, 그거야말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든다. 또 누군가가 내게 부당한 모욕을 줬다면 그 사람은 과연 행복한 삶을 살까, 그렇지 않다고 봐야 한다. 다 함께 불행한 이 삶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은 거다.
-<돈의 맛>이 <하녀>를 포함한 이전작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지점에 놓인다고 할 수 있나.
=<하녀>를 만들면서 아쉬웠던 게, 좀더 유머러스하게 가야 했는데 시나리오부터 촬영, 개봉까지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는 점이다. 물론 블랙 유머이긴 하지만 그래도 <돈의 맛>은 내 영화 중에서 제일 유머러스한 작품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제일 어려운 건 아름다운 사랑…. (웃음) 고민 중이다. 영작과 나미의 사랑이 아름답게 느껴지려면 클리셰로서 안타까운 감정도 좀 들어야 하는데 과연 내가 그것까지 할 수 있을 것인가! (웃음) 아마 그런 식의 러브스토리는 아닐지 모르겠지만, 분명 임상수식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는 있다.
-지금 투자 단계라고 알고 있다. 캐스팅 작업은 어떻게 진행 중인가.
=윤 회장과 백금옥 역으로 백윤식 선생님과 윤여정 선생님이 출연할 것 같다. 영작과 나미 커플은 아직 캐스팅 중이다. 얼마 전 시네마닐라영화제에 갔을 때 필리핀 하녀 에바 역에 맞는 배우들을 좀 만났다. 멋있고 고저스(gorgeous)한 배우를 캐스팅하려고 한다. 영작이라는 주인공이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나머지 역도 다 만만치 않다. 좋은 배우들의 앙상블을 살리고 싶다.
<돈의 맛>은 어떤 영화?
백씨 집안의 ‘마귀 같은’ 상속녀 백금옥, 백금옥의 남편이며 ‘인생을 숙고하는 미치광이 반항아’인 윤 회장, 백금옥의 비서 주영작, 성숙하고 아름다운 백금옥의 딸 윤나미, ‘진화하는 부자’인 백금옥의 아들 윤철. <돈의 맛>에 등장하는 캐릭터 중 일부다. “<돈의 맛>은 (<하녀>보다) 더 많은 인물들의 더 많은 애증, 더 많은 섹스, 더 많은 음모, 더 많은 현금이 나온다. 돈의 아수라장에서 익사당하지 않고 투쟁하는 한 아름다운 넥타이족 청년의 이야기이며, 그 청년과 부잣집 딸의 뻔한 듯 쿨하고 성숙한 러브스토리이다. 세상에 악인이란 없다고 믿는다. 다만 악인의 입장만이 있을 뿐이다. 거대한 돈을 벌고 그걸 지키려는 입장, 누구도 그들의 입장을 부인할 순 없다. 다만 혼탁한 시대의 더러운 탁류 속에서 돈을 좇다가 익사할 수밖에 없었던 분들에게 애도를 바친다.” 임상수 감독은 <돈의 맛>의 기획의도를 이렇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