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하게 시작은 했는데 막상 <북촌방향>을 설명하려니 난감하기만 하다. 시간을 중심 화제로 놓고 이 영화의 서사를 추릴 때 실은 다음과 같이 너무 간단해지기 때문이다. 전직 영화감독 성준(유준상)은 어느 날 서울의 북촌에 도착하여 친한 형인 영호(김상중)를 만나고 과거의 여인이었던 경진(김보경)을 잠깐 방문하고 영호가 아끼는 후배 보람(송선미)과 성준의 첫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중원(김의성) 등과 어울려 한정식집과 술집을 오가고 경진과 놀랄 만큼 닮은(실은 김보경이 1인2역 하는) 술집 주인 예전에게 관심을 쏟게 되고 그녀와 키스도 하고 하룻밤을 지낸다. 이야기가 이걸로 끝인가. 실은 끝이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는 안될 것 같고 조금 다른 식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한글 제목은 공간적으로 ‘북촌방향’이고 영어 제목은 시간적으로 ‘The Day He Arrives’(그가 도착한 날)인 이 영화는 공간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한눈에 조감되지 않는데, 특히나 시간이 어떻게 조감되지 않는지를 더 힘주어 말해야겠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북촌방향>의 시간은 다르게 느껴진다. 1. 이것은 차례대로 연이어지는 며칠간의 이야기다(A-B-C-D). 성준의 동선이나 그가 한정식집이나 술집을 드나드는 숫자에 기준해보면 그렇다. 2. 하지만 성준이 북촌에 도착한 첫날이 계속 다른 가능성 속에서 되풀이되는 것 같기도 하다(A-A1-A2-A3). 성준은 ‘소설’이라는 술집에 갈 때마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오늘 소설에 갔다”거나 “오늘 소설이라는 데를 갔다”고 처음 가는 것처럼 말하지, 오늘 또 소설에 갔다고 말하지 않는다. 성준이 술집 여주인과 인사를 할 때마다 매번 반응만 다를 뿐 둘은 꼭 첫인사를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3. 1, 2가 다 성립한다는 건 말이 안되는데 실제로 영화는 그러하니 이 영화의 시간은 차라리, 누군가가 무엇 했다면, 혹은 하지 않았다면, 이라는 식의 가정과 가설의 의문이 끊임없이 따라붙으며 생성되어 나가는 제3의 시간에 가깝다. 그런데 홍상수는 인물이 같은 소품을 들게 하거나(성준과 영호가 든 일회용 커피잔), 짧은 대사 한마디(성준의 술냄새에 대한 언급)만으로도 산술적 시간논리를 깨뜨리고 제3의 시간 웅덩이로 영화를 빠뜨리는 신기를 보여준다. 예컨대 영화에서 성준은 어떤 여배우와 학생들을 거듭 만나게 되는데 그들은 이 제3의 시간을 가능하게 해주는 출현들 중 하나다. 그 점들을 다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만 주의 깊게 본다면 영화가 따로 소제목을 달진 않았지만 임의적인 상태에서 ‘5장’으로 나누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각 장의 시작은, 북촌의 첫 표지판이 나올 때-안동교회 표지판이 나올 때-정독도서관의 표지판이 나올 때-성준과 영호가 커피를 들고 재동사거리를 걸어내려올 때-성준이 혼자 골목길을 내려올 때이고, 물론 그게 5일은 아니다. 흔히 이런 경우를 두고 잠재적 시간성의 출현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그런데 그건 좀 딱딱한 철학적 표현이 아닐까, 생각할 즈음 다음과 같은 문장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서로 접근하기도 하고, 서로 갈라지기도 하고, 서로 단절되기도 하고, 또는 수백년 동안 서로에 대해 알지 못하기도 하는 시간의 구조는 모든 가능성을 포괄하게 되지요. 우리는 이 시간의 일부분 속에서만 존재합니다. 어떤 시간 속에서 당신은 존재하지만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른 어떤 시간 속에서 나는 존재하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 다른 시간의 경우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존재합니다. 호의적인 우연이 내게 부여한 현재의 시간 속에서 당신은 나의 집에 당도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시간, 그러니까 정원을 가로지르던 당신은 죽어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될 겁니다. 또 다른 시간에 나는 지금과 같은 똑같은 말을 하지만, 나는 하나의 실수이고, 유령일 겁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유명한 단편소설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의 한 문장인데 <북촌방향>의 시간에 관 한 묘사로 더없이 적절해 보인다. <북촌방향>은 애초에 3부로 나눠갈 계획이었으나 예정과 다르게 한 흐름으로 이어냈고 다른 라스트신을 염두에 두고 촬영까지 마쳤으나 지금의 장면을 라스트신으로 정했다. 이 영화가 하루의 일인지 며칠간의 일인지 유준상이 처음 물었을 때 홍상수는 허허 웃으며 일단 찍자고 하더니만 촬영 중에 유준상이 재차 묻자 결국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홍상수다운 대답. <북촌방향>의 시간은, 사실을 벗어나는, 아무도 모르는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