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활동을 말하지 않고 건너뛰긴 어려울 것 같다. 홍상수 영화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다양한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시간의 압축과 확장에도 깊은 연관이 있다는 건 이미 밝혀진 것인데, <북촌방향>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의외로 단출하다. 그게 이 영화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의 특별한 점이다. <북촌방향>에서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을 갖는 건 성준과 경진 두 인물뿐이다. 그런데 쓰임이 상반된다. 성준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철저하게 그의 내면 상황만을 기술한다. 경진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철저하게 그녀의 존재를 성준에게 상기시키는 데에만 쓰인다. 말하자면 성준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홀림을 당하는 존재의 심리적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고 경진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언제든 그를 홀리러 나타날 경진이라는 존재의 시간적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다. 경진이 성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김보경이 그걸 읽는다. 결정적으로 성준이 술집의 문 앞에 서 있을 때 경진의 목소리가 등장한다. 술집 주인 예전(그러니까 육체의 김보경)이 음식을 사러가겠다며 프레임을 막 벗어날 때 그 뒷모습을 보던 성준을 자극하는 경진의 문자(그러니까 목소리의 김보경)가 날아든다. 두 번 날아든다. 경진의 목소리는 한번은 부드럽게 추억을 거론하며 홀리고 또 한번은 자기를 버린 성준을 책망하며 무섭게 홀린다. 어쨌거나 홀리는 건 마찬가지다. 그때 눈앞에 육체적으로 존재하는 저 여인 예전과 목소리로 막 도착한 여인 경진이 팽팽한 긴장을 이룬다. 그때에 홀려서 이도저도 못하는 성준은 엉겁결에 두 번 다 눈에 보이는 예전을 뒤따라간다. <옥희의 영화>의 화장실 앞에서 옥희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나이든 남자(문성근)와 젊은 남자(이선균)의 시간계를 합쳐냈던 매개였음을 기억해내자. 여기서의 경진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성준의 시간계를 아예 덮쳐버린다.
그 다음으로 느껴야 할 건 밤과 낮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흑백 화면이다. 홍상수의 두 번째 흑백영화라고만 <북촌방향>을 말하는 건 무용하다. 이때 흑백은 기억이나 과거와도 관계가 없다. 그보다는 밤과 낮의 확실성이 우선 중요하다. <북촌방향>의 시간감은 시계로 잴 수 있는 물리적 시간감이 아니라 어둠(밤)과 밝음(낮)이라는 명암의 시간감이다. 인물들은 몇시부터 몇시까지 어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밤과 낮 그 어디에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시간은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그냥 밤낮만 바뀌어가는 것이다. 바뀌고는 있지만 진전하지는 않는다는 것이 관건이다. 그건 컬러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흑백은 그 다음에야 중요하다. 흑백화면이 밤낮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둘을 어렴풋하게 묶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지만, 밤과 낮만 있는 시간이라는 걸 더 강조하기 위해 감싸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세상은 온통 흑백인데 게다가 그 안에는 의미상의 밤과 낮만 있는 것이다. 홍상수라면 이것을 시간을 눌러서 다림질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오! 수정>의 흑백이 ‘기억의 흐릿함’을 위한 것이었다면 <북촌방향>의 흑백은 ‘시간의 불투명함’을 위한 것이다. <북촌방향>은 어제나 오늘의 밤과 낮이 되풀이되는 것이지 어제의 밤 다음에 오늘의 낮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보와 인상이 회귀하고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인지적 착각과 교란도 중요하다. 이 점이 아주 요상하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1인2역이다. 홍상수 영화의 전통적인 것이 아니겠나 싶지만 작용이 좀 다르다. 홍상수 영화의 1인2역은 대체로 어떤 존재의 ‘형상’의 유사함이나 동일함이나 차이로 충격을 가한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극장전>이 그렇고 그걸 확장하면 <옥희의 영화>가 된다. 그런데 <북촌방향>은 정확히 시간을 겨냥한다. 인물의 존재에는 혼선이 없는데 그가 하는 말 때문에, 우리의 뇌가 스스로 알아서 혼동하고 고민하면서 이 시간 저 시간을 맞춰보려고 움직이게 된다. 섬뜩하기까지 한 장면들이 있다. 성준이 일행을 두고 술집 밖으로 음식을 사러 나간 예전을 두 번째 따라가서 그녀와 키스를 할 때 처음에는 소극적이던 예전은 돌연 “오빠! 헤어지고 오는 거지요? 나한테?”라고 말한다. 그 둘은 만난 지 얼마 안됐거나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가. 그 순간에 우리의 눈은 예전을 보고 있는데 그녀의 대사가 예전의 육체 위에 경진을 씌운다. 의미상으로 그 대사는 무리와 지금 술집에서 헤어지고 난 다음 나(예전)에게 오라는 말이지만 이미 성준과 경진의 관계를 알고 있는 우리의 뇌는 알아서 그걸 ‘내게 돌아오라’는 경진의 청으로 듣는다. 여기까지라면 존재만 흔들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시간도 흔들리게 된다. 예컨대 성준은 예전과의 섹스를 끝내고 “난 네가 누군지 알 것 같다”고 말하는데 그때 예전은 “누군지 모를 텐데”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예전은 “오빠처럼 이렇게 나 쳐다보던 사람 없었던 것 같아”라고 말한다. 이때 중요한 건 “없었던 것 같아”라는 대사의 시제가 주는 뉘앙스다. 그때 우리의 뇌는 영화의 도입부에서 경진을 찾아갔던 날 무릎 꿇고 우는 성준에게 내 눈을 보라고 종용하던 경진을 떠올린다. 보여지는 순서로는 성준과 예전의 신이 뒤에 있고 성준과 경진의 신이 앞에 있다. 하지만 눈을 보고 안 보고를 사이에 두고 정작 그 시간 순서의 인지가 뒤바뀐다. 성준과 예전의 지금 상황이 성준과 경진의 과거처럼 보이게 된다. 과거에 그들은 눈을 보며 서로 예쁘다고 말하는 사이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동안 홍상수의 영화에 관하여 잘 말해지지 않은 것 한 가지에 관하여 <북촌방향>을 계기로 말할 때가 됐다. 차이와 반복이 홍상수 영화의 것이라고 늘 말해왔다. 그것 때문에 대구도 대칭도 중요했다.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접속과 연결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소홀했던 것 같다. <북촌방향>이 그 점을 분명히 확장한다. <옥희의 영화>와 비교해보면 이 점이 두드러진다. <옥희의 영화>에서 우리가 확언할 수 없었던 건 인물들의 존재감이자 정체성이었다. 누가 누구인가 알 수 없는 것. 그게 <옥희의 영화>의 신비였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옥희의 영화>의 그 신비를 지탱해낸 중요한 역할을 한 건 소제목과 크레딧, 즉 그 장과 막의 구분이었던 것 같다. <옥희의 영화>는 잘 붙이는 게 아니라 잘 떼어내는 게 중요한 영화였다.
우리는 <북촌방향>에서 결코 성준이라는 존재가 헷갈리지는 않는다. 성준은 성준이고, 보람은 보람이다. 경진/예전이라는 인물 사이의 교란이 있다고 말했지만 그 둘의 인상이 교란되는 것이지, <옥희의 영화>처럼 그들의 존재를 규정할 수 없는 것까지는 아니다. <북촌방향>에서 헷갈리는 건 성준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성준의 시간이다. <북촌방향>이 차이와 반복을 다소 희미하게 만든 대신 접속과 연결을 강력하게 드러낸 덕분이다. 지금까지 홍상수는 대체로 많은 영화에서 하나의 큰 전체를 상정한 다음 그걸 나누어서 재배열하면서 가능해지는 무수한 미시성을 중시해왔다. 그 미시적 가능성이 어느 종착지에 도착하는 영화였다. 그 때문에 폐쇄적 순환의 영화가 많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차이, 반복, 장과 막, 대구, 대칭이 중요했다. 그런데 <북촌방향>에는 5장의 작은 전체가 있다. 정해진 테두리의 큰 전체는 없다. 그 작은 전체들, 즉 시간들이 덩어리째로 분기하고 교차하면서, 접속하고 연결되면서 재배열되어 정해지지 않은 그 바깥쪽 어딘가로 터져 흘러나간다. 홍상수는 그게 어떻게 되어가는지 보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이제 이 영화로 우린 홍상수 영화의 폐쇄적 순환을 넘어 무한까지도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걸 <옥희의 영화>에서 ‘존재’로 경험했다면, <북촌방향>에서는 ‘시간’으로 경험한다. 그러니 보르헤스의 문장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엉터리 도형의 그림을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접속과 연결이 중요하다는 말을 기억해주면 좋겠다. 성준은 영호를 만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보람과 중원을 만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경진/예전을 만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혼자 떠돌다가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이 영화의 시간은 무한대가 된다. 그 결과 북촌에는 우리가 말도 안된다고 말했던 우주적 계열의 시간들이 마침내 공존하게 된다. <북촌방향>에서의 ‘아무것도 아닌 것인 중요한 것’으로서의 시간은 마침내 그렇게 성립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