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영화는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
2011-09-06
글 : 김혜리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북촌방향> 개봉 앞둔 홍상수 감독 인터뷰

<북촌방향>은 2010년 12월10일부터 27일까지 7회차에 걸쳐 북촌 일대에서 만들어졌다. 여섯 번째 촬영과 마지막 촬영 사이 4, 5일의 휴지기가 있었다. 홍상수 감독이 들려준 거의 모든 대답의 서두였던 30여번의 “기억이 잘 안 나는데”는 생략했음을 일러둔다. <북촌방향>의 스포일러가 불가피하게 포함돼 있다.

-전작 <옥희의 영화>는 모든 여건이 열악한 상태에서 “이런 극한 상황에서 만들면 어떤 것이 나올까” 하는 호기심과 “나는 어떤 상태에서도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확인해보고 싶은 심정으로 시작된 걸로 기억한다. <북촌방향>의 시작은 어땠는가.
=<옥희의 영화>를 2009년 겨울에 찍은 뒤 영화제 다니고 개봉시키다보니 뭘 했는지 모른 채 시간이 갔다. 2010년이 가기 전에 새 영화를 찍어야지 생각했다. 실은 그 사이 전북 부안을 다녀왔다. 부안에서 찍을 이야기가 잘 떠오르지 않아 어딘가에 들어가 잠시 생각을 하고 싶었다. 마침 PD가 아는 분이 싸게 해준다고 해서 인사동 레지던스 호텔에서 이틀을 보내게 됐다. 객실은 높은 층이었고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곤 했는데 바로 내려다보이는 동네가 북촌이었다. 무심코 쳐다보다가 저기서 그냥 찍을까보다 싶었다. 내가 강북에서 가는 동네가 북촌밖에 없기도 하다. 밥집도 비슷한 두세곳만 가고 커피집도, 술집도 가는 데만 간다. 주인공이 한 장소를 세번 연달아 가는 이야기를 해보자 하는 안(案) 정도만 들고 시작했다.

-<옥희의 영화>는 재직하는 학교에서 대부분 찍었는데 이번에도 감독 본인이 일상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가 영화에 들어온 셈이 됐다. 일부러 그 동네 레지던스를 고른 게 아니니 처음부터 우연이 작동한 것 아닌가.
=그런 일, 참 많다. (미소)

-<옥희의 영화>는 진구(이선균)의 하루를 그린 1부가 만들어지고 2부, 4부, 3부 순서로 하나씩 붙어나가는 방식으로 완성됐다. <북촌방향>은 “영화감독 성준(유준상)이 서울에 온다”가 유일한 모티브였나? 아니면 몇명의 인물 구도가 있었나.
=처음에 유준상씨를 정했고 이어 순서는 확실치 않지만 송선미, 김보경, 김상중씨와 같이 하자고 했다. 결정돼 있던 것은 같은 장소를 여러 번 간다는 정도였고 배우들을 하나씩 정하는 과정에서 파편적으로 떠오르는 것들을 메모하는 시간이 한달 정도 있었다. 억지로라도 (트리트먼트를) 써서 들어갈까 망설이다 결국 아무것도 없이 들어갔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할 때는 다만 열쪽이라도 트리트먼트가 있었고 <하하하> 때도 짧아지긴 했지만 있긴 했는데 <옥희의 영화>는 1부 이야기만 촬영 며칠 전에 정했고 <북촌방향>은 전체 틀이나 전개가 전혀 없이 일기처럼 틈틈이 써둔 약간의 메모뿐이었다. 그냥 하루하루 찍어가자, 어찌 되나 보자 했다. 직감적으로 심어놓은 대사 하나가 다음 촬영 회차에 연결되어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식으로 6회차까지 어려움없이 갔다. 6회차에 술집 ‘소설’을 성준이 마지막으로 나서는 장면까지 찍고 마무리를 생각하기 위해 모두에게 며칠 시간을 달라고 했다. 눈 온다는 말이 있어 날씨를 기다리겠다는 마음도 있었다.

-영화의 결말에 눈이 오길 바란 건가.
=그렇다. 그러다 촬영 전날인 26일에 어떻게 찍을지 결정하고 백종학, 기주봉, 백현진, 고현정씨에게 연락을 했다. 세 분은 우연히도 이튿날 사정이 허락됐고 고현정씨는 밤에야 통화가 됐는데 중요한 선약이 있는 상태였다. 직접 찾아가 마지막 신이 될 것 같으니 죄송하지만 그 약속을 미룰 수 없냐고 부탁했다. 고맙게도 들어주었다.

-마지막 장면의 행인이 반드시 고현정이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존재감이 강한 배우라 앞의 내용을 삼켜버리는 역효과를 우려할 수도 있는데.
=물론 사정이 안된다고 했으면 어떻게든 다른 분을 구해보려 했겠지. 말로 설명하기 힘든데 그냥, 거기 고현정씨가 있어줬으면 했다. 내가 믿는 배우가 그 자리에 떡하니 있어야겠다 싶었고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이 고현정씨였다.

-인물들이 돌아다니는 북촌의 여러 장소 중 감독 머릿속에서 중심이 된 곳이 있었나.
=미리 한곳을 정해봤자 가게 주인이 한회차 촬영 뒤 마음이 변할 수도 있지 않나. 장소이용료를 많이 드릴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니 언제나 내 머리 밑바닥엔 예기치 못한 어떤 사정이 생길 수 있다, 그러면 바꾼다는 생각이 있다. 단 중심이 술 먹는 장소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식집 ‘다정’에서도 술은 마실 수 있지만 ‘소설’이 자리한 골목의 모양새, ‘소설’이라는 이름이 주는 느낌, 실내 분위기가 더 마음에 들어서 그곳으로 정했다.

-<오! 수정>에 이어 두 번째 흑백영화다. 흑백으로 가자는 결단은 어느 시점에 어떻게 내려졌나.
=편집하는 도중에 한번 흑백으로 바꿔보았는데 딱 맞는 느낌이 들어서 김형구 촬영감독에게 양해를 구했다. 여러 차례 함께 작업해본 터라 내 방식을 이해해준다. (웃음) 단순하게 눌러주는 느낌도 있고…. <오! 수정>도 그랬지만 내가 약간 겨울을, 특히 서울의 겨울을 흑백으로 볼 때 더 예쁘게 보는 면이 있나보다.

-홍상수 영화에 대해 “이 영화로 뭘 이야기하고자 했는가?”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모티브를 찰흙덩이처럼 감독이 던져놓으면 배우와 그날의 조건이 붙어가며 영화가 몸을 불려가는 방식이니까. 이제 우연이 영화를 밀어간다는 확신을 갖고 작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영화를 총괄하는 질문은 “이번에는 그 우연이 얼마나 원활하게 작용했는가?”가 돼야 할 것 같은데.
=6회차까지 순조로웠다는 아까 한 말이 그 대답이다. 1회차에서 성준이 아는 여배우를 만나는 장면을 찍으며 그녀가 “학생들을 만나기로 했다”는 대사를 짤막하게 집어넣었다. 그리고 고갈빗집에서 성준이 우연히 영화과 학생들을 만나지만 그들이 여배우의 학생으로 뒷부분에 돌아올 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엮여도 안 엮여도 상관없으니 혹시나 해서 짧게 넣었던 대사라 잊고 있었는데 결국 후반부의 장면이 됐다.

-“서두르면 아무것도 안 보인다”라는, 성준이 여배우에게 한 충고가 나중에 제작자(기주봉)에 의해 성준한테 돌아오는 것도, 6회차에서 “20분 안에 영화 관련된 지인 네명을 연이어 만났다”는 보람의 일화를 성준이 체험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인가.
=마지막 장면에는 당연히 앞서 찍은 모든 걸 사용할 수 있지 않나. 어떤 작품이건 촬영 중반이 지나고 나면 가끔씩 결말을 생각한다. 악착같이 고민하는 건 아니고 간혹 의식하며 이렇게 저렇게 생각해본다.

-앞에서 뿌린 단초를 거둬들이는 지점이니 결말부만큼은 우연과 생각의 비율이 좀 다르다고 봐도 될까.
=근데 생각이 우연을 통해 일어나지 않나. 중요한 사건과 포인트는 우연이 거의 다인데 그 사이를 우리가 인위적으로 연결시키며 한 덩어리로 만들기도 하고 폐기처분하기도 하는 거다.

-이번 영화에서 유준상의 의상은 감독 본인 스타일이다. 비슷한 옷인가, 진짜 감독의 옷인가.
=속에 입은 윗도리가 촬영 첫날 내가 입고 간 옷이다. 이번엔 내 옷을 안 주고 준상씨 옷 중에 괜찮은 게 있어 입기로 했는데 촬영 당일 그 친구가 자꾸 내 옷을 입고 싶다고 해서 봉고차 안에 들어가 바꿔 입었다. (웃음) (이에 배우 유준상이 밝힌 진실은 단순하다. “감독님 옷이라서가 아니라, 옷이 예뻐서 그랬다. 어릴 때 입던 팔꿈치에 가죽 덧댄 스웨터를 좋아했는데 요즘엔 안 나와 아쉽던 차에 감독님이 입고 오셨기에 빌려 입었다.”)

-서울에 도착한 성준의 첫 대사, “어떤 새끼도 안 만나. 서울을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통과해 가겠어. 그리고 집으로 슝슝!” 하는 대사가 단호하고 인상적이다.
=서울에 그런 마음으로 왔음을 설명하는 셋업(set-up)이다. 조금 빨리 가면서도 볼 건 보고 맛볼 건 맛보는 정도의 접촉은 있는 거다. 그렇다고 아는 사람 만나 주저앉혀지고 싶지는 않고. 말로는 형만 본다고 하지만, 그런 마음이 없다면 형을 대구로 불러내리거나 형 집에만 처박혀 있었겠지.

-그러다 옛 여자인 경진(김보경)의 집 앞까지 같이 술 마시던 학생들을 끌고 간 성준이 갑자기 성질을 부리고 달아난다. 그걸 보면 성준이 평온한 상태가 아니었나보다 싶다. 보통 영화라면 성준의 진짜 목적지는 경진의 집이었는데 망설이다 거기까지 가기 위해 우회로를 택했다고 볼 것이다.
=맞다. 여자 집에 가고픈 밑바닥 마음을 인정하지 않은 거지. 그러다 취하니까 구실로 경진네 근처 술집을 떠올려 “좋은 데 가자고” 학생들을 몰고 간다. 혼자서 가면 너무 스스로에게 뻔하니까. 막상 도착하니 내가 왜 얘들이랑 있나 싶어 말도 안되는 성을 내고 도망친 거지. (웃음)

-홍상수 영화는 여행 가는 영화와 안 가는 영화로 나눌 수 있다. 이번 배경은 서울이지만 여행지로서 서울이다. 주민의 서울과 여행자의 서울은 어떻게 다른가. 한편 성준은 서울에서 살다 지방으로 이사간 입장이기도 한데.
=그래서 주민과 여행자의 서울이 반반씩 있는 거다. 반은 여행지고, 반은 그의 모든 추억이 그대로 있는 곳. 섞여 있는 공간이라는 점이 처음부터 재밌더라.

-그와 관련해 섹스신을 빼면 여행기인데도 성준의 숙소가 끝내 불분명하다. 어디서 자는지 명시하는 장면이 불필요하다고 보았나, 아니면 반드시 지워야만 했나.
=“동생 집이 비어 있다”는 대사가 나오긴 한다. 근데 결국 큰 문제가 안되는 건, 이 영화가 하루하루 이어져 축적되는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그날그날이 매번 첫날처럼 보일 수 있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텔이건 동생 집이건 묵었다 나오는 모습이 나오면 그건 명확히 이튿날이 되지 않나.

-<북촌방향>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옥희의 영화>는 한 배우가 연기하는 같은 이름의 사람인데도 인물의 동일성이 모호했는데, <북촌방향>은 시간의 동일성이 모호하다. 특히 술집 ‘소설’과 근처 골목 장면은 시간이 소용돌이치는 장소 같다. 인물들은 계속 똑같은 옷을 입고 나오고, 두 번째 나오는 상황을 처음처럼 받아들이는 리액션도 있다. 반면 영화의 일부를 덩어리로 보면 그 안에서는 최소한의 선후 관계가 보인다.
=성준과 영호(김상중)가 여배우(박수민)와 다시 마주쳤을 때 “형님 만난다고 하더니 만나셨네요”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럼 아까 만남이 먼저라는 건 확인되지만, 그 두 만남이 같은 날 오후 1시와 4시에 이뤄졌을 가능성도 있는 거다. 또, 형과 처음 만나는 신에서 영호가 성준에게서 생선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앞서 경진 집에서 나오는 신이 있지만 냄새가 이튿날까지 날 리는 없으니 형과도 첫날 만난 것일 수 있다. 그렇게 감정이나 정보가 축적되어가는 축이 있고, 매일이 첫날처럼 보이는 축이 있다. 양축이 동시에 가고 왔다갔다한다. 이어지지도,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 느낌이 섞인다.

-‘소설’의 주인 예전(김보경)과 성준이 골목에서 두 번째 키스할 때도 성준은 지난번 키스를 기억하는데 예전은 모르는 일처럼 반응한다.
=70%는 정말 기억이 안 났을 가능성이 있고 30%는 여자가 내숭을 떠는 걸 수도 있다. 말하자면 축적되는 축과 축적되지 않는 축이 충돌하는 건데, 벽에 기대 다시 뽀뽀한 다음에는 돌연 예전이 성준을 “오빠!”라고 부른다. 그 순간 예전이 느낌상으로는 경진이 돼버린다. 과거의 경진과 지금의 예전이 한몸이 된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 충돌이 터져버린다고 해야 하나.

-그 장면의 대사도 중의적이다. “돌아올게. 다 보내고” 하는데 술집의 동행을 보내고 예전에게 온다는 것 같기도 하지만 “모든 걸 버리고 너한테 갈게”라고 경진한테 말하는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현실적으로는 술집으로 다시 온다는 뜻으로 정리가 되지만, 성준이 “돌아올게”라는 말과, 부연하는 다음 대사를 조금 떼어서 말한다. (그 틈에서 다른 해석의 여지가 생긴다.)

-<북촌방향>의 시간이 이상하게 흐르는 조짐을 처음 느낀 건 성준과 경진이 침대에 쓰러지는 숏이 성준이 그녀의 집을 나서는 장면으로 거의 이음새없이 미끄러질 듯 연결된 장면이 나왔을 때였다. 거기까지는 사건과 시간이 반복 없이 직선으로 흘러왔기 때문에 보통 영화와 같은 방식으로 관람했는데, 그때 타임슬립이 일어난 듯한 인상을 받았다. 그 장면을 촬영한 시점에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 결정된 상태였나.
=말한 두숏은 편집하면서 줄인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아침에 떠올라 애당초 그렇게 찍었다. 시간 구조는 경진 집 장면을 찍은 다음날이었나, 2회차 뒤에 그렇게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럼 기자가 그 편집에서 받은 느낌은 영화의 뒷부분에 의해 사후적으로 덧씌워진 걸까.
=앞과 뒤는 계속 그렇게 서로 영향을 주는 거다. 이후 경진을 문자메시지로만 등장시킬지 아예 현재 북촌으로 불러들일지는 망설임이 있었다.

-결국 골목의 뽀뽀장면에서 마치 유령 같은 방식으로 경진이 북촌에 오긴 온 셈이다. 전작에 꿈 시퀀스가 많은데 <북촌방향>에는 꿈은 없고 성준이 조는 장면만 하나 있다. 그래서 예전과 경진 중 한 여자가 꿈 시퀀스의 자리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옥희의 영화>와 달리 김보경씨는 확연한 1인2역인데 배우에게 어떻게 설명했나.
=그런 부분은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 편이다. 그냥 대사를 써서 건네고 배우가 처음 읽는 걸 보고 대사와 신의 느낌을 배우가 받아들이는 방식이 내가 원한 방향이면 아무 말 않는다. 좀 오해한 듯한 구절이 있으면 교정하는 정도. 내 영화는 분석해서 인물을 이해한 다음 들어가는 영화가 아니니까. 대부분 아무 말도 더할 필요가 없는 걸 보면 배우와 나 사이에 무슨 작용이 분명 일어나는 것 같다.

-술자리에서 성준이 하는 대사에도 나오지만, 감독님은 심리적 동기와 결과가 직접 연결돼 있다는 걸 부정하는 입장이다. 심리적 인과로 그어지는 연속성이 삶에서 거의 의미없다는 입장인가.
=심리적 인과란 본인이 됐건 타인이 됐건 관찰자가 과거에 일어난 일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거다. 본인이라 하더라도 관찰자의 제한된 정보와 목적에 의해 왜곡되고 관찰 당시 감정 상태에 의해 또 왜곡된 결과다. 실제 일어난 일을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보따리로 꾸려낸 것일 뿐이다. 그 보따리가 삶의 총체적 그림을 제대로 그려냈다고 말한 순 없다. 거대한 하늘에 보따리 하나를 갖다대는데 눈앞에 바짝 대니 보따리밖에 안 보이는 거다. 가위로 잘라버리면 다 터져버릴 건데.

-그렇다면 인간 행위에서 책임의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책임이라는 말을 믿기 때문에 뭔가를 더 할 수 있다고들 생각하지만 한발 물러나보면 과연 그럴까. 하고 싶고 할 수 있어서 하는 일을 책임이라는 말을 통해서도 하고 다른 말을 통해서도 하는 거다.

-듣고 나니 여건이 안돼 영화를 못 만드는 거냐, 안 만드는 거냐는 질문에 성준이 “무슨 차이가 있나”라고 반문한 대사가 떠오른다. 동틀 때까지 술을 마신 손님들과 술집 주인이 눈 오는 아침에 택시를 잡아 차례로 떠나는 장면이 스산하면서도 아름답다. 사실 없어도 무방한 장면인데.
=그날 배우 전원이 모였는데, 그쯤에서 다들 모인 걸 안 찍으면 나중에 보여줄 기회가 없을 것 같았던 게 그 장면의 단순한 이유다. (웃음) 촬영 끝난 배우들도 가지 않을 수 있다면 있어달라고 청은 했지만 가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들 머물러 있었다. 근데 뭘 찍어야 할지 모르겠는 거다. (웃음) 그래서 슬슬 큰길로 걸어나가 배우들 서는 위치를 정해주고 어떻게 되나 봤다. 세 테이크 갔는데 운좋게도 택시들이 원하는 타이밍에 도착했다. 통제? 전혀 안 했다. 기사는 보통 승객인 줄 알았을 거다. 한참 가다가 택시를 세우고 기본요금 내고 돌아오고 그랬다. (폭소)

-팬을 자처하는 여자(고현정)에게 사진을 찍히는 마지막 장면의 성준의 표정 때문에 이 영화가 악몽 같은 잔상을 남긴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 같다. 그 순간의 표정을 어떤 말로 배우에게 설명했나.
=집중하는 얼굴을 요구했던 것 같은데 기억 잘 안 난다.(유준상의 기억은 다음과 같다. “특별한 말씀은 없었다. 당시에는 엔딩 장면이 따로 있었기 때문에 마지막 신이라고 생각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 사진 찍히고 있는 상태에만 집중했는데, 나중에 그 신이 엔딩이 되고 나서는 라스트신인 줄 알았으면 그 얼굴이 안 나왔을 거라고 감독님이 말씀하셨다. 나 역시 그랬다면 그만큼 자연스럽지 않은, 다른 걸 의식한 얼굴이 됐을 거라고 생각한다.” 한편 현장 지척에 있던 정한석 기자는 홍 감독이 갑자기 몸을 기울이며 “준상아, 눈깔이 확 변해야 돼!”라고 말했다고 기억한다.)

-감독님의 작업을 지켜보고 있으면 “내 영화가 발전한다, 개선된다”는 개념이 없을 것 같다는 짐작이 든다. 혹시라도 자연스러움이라든가, ‘더 좋아지는 것’의 기준이 있는지.
=내게는 영화를 만들 때 견지하는 태도와 세부적인 몇 가지 원칙이 있고 그게 시간, 사람, 배우, 무수한 우연과 맞닥뜨리면서 계속 움직이고 있기만 하면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한다. 목표점 같은 건 없다. 변한다고 말하기도 싫고 어디를 향한다고 말하기도 싫다.

-‘움직인다’고 표현했는데 머릿속에서 그 운동을 어떤 형상으로 상상하나? 분자들이 떠도는 운동 같은 건가 움찔거림 같은 건가.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자리를 이동하는 것? 삶에서 내가 갈 수 있는 공간은 이미 한계가 지어져 있는 것 같다. 유한하고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그 안에서 오늘은 A동에 갔다가 내일은 B동에 가서 살고 C동으로 갔다가 다시 B동으로 돌아오기도 하는 거다. 그때마다 ‘움직였다’는 쾌감이 있다. 같은 지점으로 돌아와도 그동안 내가 변했기에 새로운 걸 느끼는 쾌감도 있고.

-성준은 예전과 헤어지며 매일 일기를 쓰라고 당부한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영화 만들기가 일기의 개념과 겹치는 부분이 있나.
=어떤 식의 일기냐에 따라 다르다. 보통은 책임이나 세상의 이데올로기나 어떤 틀거리를 갖고 그걸 내가 왜 잘 못 맞췄을까 후회하는 내용으로 일기를 쓴다. 그런 일기와 영화 만들기는 다르다. 그런데 다른 식으로 일기를 쓴다면, 매일 닥친 일에 대한 자기의 대응을 쳐다보는 행위라면 영화 만들기와 비슷할 수 있겠지. 쓴다는 행위가 어떤 결과물을 낳는 점도 같고. 하지만 흔히 쓰는 반성, 자기 정돈, 부추기거나 격려하려고 쓰는 일기는 영화 만들기와 닮은 점이 없다. 영화는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미디엄을 통해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이니까.

홍상수 감독은 완성된 단편 <리스트>를 9월 중 공개할 예정이며 지난 7월 부안에서 이자벨 위페르, 유준상, 정유미, 윤여정, 문소리 등과 찍은 <다른 나라에서> 후반작업을 앞두고 있다. 줄곧 비 내린 부안의 모항에서 장편영화 한편과 단편영화 한편을 연달아 촬영해버린 이튿날 새벽. 동트는 펜션 마당으로 내려선 홍상수 감독은 불현듯 “아, 영화 찍고 싶다”라는 혼잣말을 뇌까려 주변을 경악하게 했다고 한다. (특히 김경희 PD의 낯빛은 파래졌다고 전해진다.) 그러니까 우리는 2011년이 가기 전에 그가 열세 번째 장편영화를 찍는다는 소식이 들려도 놀라서는 안된다. 물론 당신의 귀에 그 소식이 들릴 즈음이라면 슝슝 이뤄지는 홍상수 감독의 촬영은 이미 완료됐을 가망성이 높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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