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조화(造化)로운 움직임”
2011-09-06
글 : 강병진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1인2역 맡은 김보경

<북촌방향>에서 김보경은 1인2역을 한다. 아니, 말과 시간 속에서 헤매고 있는 성준의 여정에서 보면, 1인3역 혹은 1인4역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성준(유준상)이 ‘2년 전에’ 헤어진 연인 경진이고, 성준이 북촌의 어느 술집에서 만난 여사장 예전이고, 그 다음날이거나 아니면 또 다른 어떤 날 처음 만난 예전이고, 성준이 북촌에서 시간을 보내는 사이 매일 밤 문자를 보내는 경진이다. 같은 듯, 다른 듯 보이지만 극중 영호(김상중)의 대사는 그 여자들을 통칭하는 설명인 듯 보인다. “사연이 많아. 예쁜데, 행복하게 살지는 못한 거 같아. 남자 운이 없는 것 같더라고.” 촬영 당일, 홍상수 감독에게 시나리오를 받은 김보경은 슬펐다. “너무 불쌍한 애 같아서 감독님께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연기를 하는 내 상태는 너무 좋은데, 얘는 너무 어두워 보이는 거다. 할 수만 있다면 경진이랑 예전이 둘 다 불러서 삶의 지침을 이야기해주고 싶더라. (웃음)”

영화에서 다양하게 출몰하는 김보경은 주인공 성준의 북촌여행에 두터운 결을 보태고 있다. 김보경 역시 경진과 예전을 여행하듯 오갔을 것이다. “비슷한 게 있다면 두 여자 모두 의지할 만한 남자를 찾지 못했다는 건데, 다만 경진은 어리니까 대놓고 달라붙는 거고, 좀더 어른인 예전은 조금은 쿨한 척하는 거다. 경진이 <여름이 가기 전에>의 소연 같다면, 예전은 <하얀거탑>의 희재 같았다.” 하지만 경진과 예전은 다시 또 다른 여자들로 분화한다. 경진은 2년 만에 찾아온 옛 연인을 “정말 미치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라며 안아준다. 그러고는 다시는 보지 말자며 떠나는 그에게 ‘담배 두 개비’를 달라고 한다. 혹시 그에게 남은 미련일까? “난 아니라고 봤다. 경진도 잠깐 기대고 싶은 사람이 필요했던 거다. 그런데 그렇게 잠시의 만족을 느끼고 나니 이제는 시원하게 담배를 피우고 싶은 게 아닐까 생각했다. 촬영은 그렇게 했는데, 영화를 보니 조금 다르게 보이기도 했다. 그 담배 2개비가 자신을 판 값은 아닐까. 왜 그렇게 자기를 싼값에 내던질까 생각하니까 안타깝더라.”

극중에서 예전과 성준이 나누는 2번의 키스도 연속적으로 보이지 않을 법한 장면이다. 장면 A의 키스에서 예전은 키스를 되갚아주지만, 장면 A-1의 키스에서 예전은 갑자기 성준을 ‘오빠’라고 부른다. “예전의 입장에서 처음 키스는 여행지에서 얻은 짜릿한 추억처럼 느낀 것 같다. 남자가 귀여워 보여서 ‘나도 한번?’ 이런 마음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두 번째 키스는 상당히 강렬하지 않나. 성준에게 남자다움을 느끼면서 그가 커 보였을 거다. 오케이, 내가 인정. 그래서 ‘오빠’가 나온 게 아닐까? (웃음) 한편으로는 그렇게 순식간에 무너질 만큼 기반이 약한 여자이기도 할 거다.” 영화 속 성준의 대사처럼 정말 “조화(造化)로운 움직임”이다.

홍상수의 눈으로 바라본 김보경을 <북촌방향>보다 좀더 일찍 만날 수도 있었다. 그녀는 이미 홍상수의 전작인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와 <잘알지도 못하면서>에서도 제의를 받았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시간이었다”고 했다. <북촌방향>의 두 여자처럼 아무것도, 어디로 가야 할지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모르던 때였다. 인상적인 연기를 보였던 <하얀거탑> 이후의 침체기와도 맞물리는 시간이다. “연기라는 게 인생이랑 같이 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발성과 발음이 안되고, 그러니 연기도 안되더라. 그때는 정말 죽고 싶을 만큼 절망하던 때였다.”

<북촌방향>은 그녀가 여행과 신앙으로 다시 용기를 찾은 뒤에 만난 작품이다. 아무런 거리낌이나 두려움 없이, “궁금해하지도 않고 그냥 해보면 되겠지”라는 마음에 북촌으로 향했던 그녀는 생애 처음으로 편안하게 하는 연기의 즐거움을 느꼈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예전 작품들을 보면서 다양한 모습이 많은데, 다소 어두운 면으로만 보이는 게 아쉽다고 했다. 이제는 좀더 다양한 기운들을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북촌방향>에 대한 여러 말들 가운데, ‘김보경의 출연작 중에서 그녀가 제일 예쁘게 나온 영화’라는 평가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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