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북촌의 꿈, <북촌방향>이라는 이 진귀한 체험
2011-09-06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북촌의 꿈

나는 <북촌방향>의 시간의 체험록을 써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이 영화의 비밀을 밝히고자 한 것이 아니다. 작용은 무수한데 뜻은 없는 이 영화는 그래서 의미상으로는 밝힐 비밀이 없다. 그 표면들의 작용 자체가 비밀이어서, 느끼다보니 감정들이 비밀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의 초입에서 영화가 시간을 다룰 수 있다고 한 나의 표현을 지금에 와서는 기꺼이 바꾸려고 한다. 어떤 영화들은 시간을 다룬다. 많은 공상과학영화들이 시간을 다룬다(<소스 코드>). 얼핏 <북촌방향>과 비슷한 이야기인 것 같은, 시간의 고장으로 한 남자의 하루가 끝없이 반복되는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할리우드영화도 시간을 다룬다. 시간을 다루는 건 문학도 할 수 있고 어쩌면 더 잘할 수도 있다. 다만 어떤 영화들은 시간을 다루지 않고 시간을 체험케 한다. 언어로는 포착하기 힘든, 그 시간의 작용을 체험케 한다. “영화는 시간이 내게 하나의 지각처럼 주어지는 유일한 경험이다”라고 장 루이 셰페르는 말했다는데,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다만 나는 <북촌방향>을 보고 나니 그의 말에 일부분만 공감이 간다. 영화라 불리는 모든 영화가 시간을 지각하는 경험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을 주는 영화가 진정한 영화이고 그런 영화가 적을 뿐인데, 나로서는 <북촌방향>과 같은 영화가 바로 그런 영화다.

삶의 실체 혹은 그중 하나인 시간을 체험하고 나니 꼭 꿈을 꾼 것 같다. 물론이다. 표현상 그렇게 말하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실체를 체험해놓고 기껏 꿈을 비유해 말하는 건 나의 무능함이지만 실체를 다 ‘알고 나서 하는 말’이 아니라 ‘체험한 다음에 하는 말’이기 때문에 일면으로는 그게 더 맞는 것 같다. 여기서 핵심은 ‘꿈’이라는 명사가 아니라 꿈 ‘같다’는 형용사에 있다. 비밀을 풀어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새로운 느낌을 새기게 된 것에 대한 감격에 있다. <북촌방향>에는 홍상수의 전작들과 달리 단 한 조각의 꿈도 등장하지 않는데도 이 영화는 홍상수의 영화 중 가장 긴 꿈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니 아직은 말하기 어려운 이 영화의 기이한 정서적 라스트신이자 에필로그, 거기에 정념이 가득 넘치는 건 당연하다. 당신도 나처럼 그 장면에 이르면, 우린 북촌의 꿈에서 또 다른 북촌의 꿈으로 끌려들어가는 것인가, 북촌의 꿈을 깨고 현실로 돌아가는 것인가, 하면서 중얼거릴지 모른다. 이 영화는 탁월하게도 거기 멈췄기 때문에 그 두 가지 다 가능하게 하며 두 가지 다 아니게 하고 그 때문에 더없이 아름답다. 이제 끝에 이르니 내가 쓴 건 결국 북촌의 꿈, 북촌몽유록(北村夢遊錄)이 아니었나 싶다.

<북촌방향>이라는 이 진귀한 체험

홍상수와 비견되곤 하는, 삶의 실체에 과격했던, 그래서 꿈 혹은 꿈과 같음의 미학을 맹렬히 시도했던,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와 분명한 차이를 지닌 그들 초현실주의자들을 지지하는 글에서 발터 베냐민은 “혁명을 위 한 도취의 힘들을 얻기. 이것이 초현실주의의 모든 책과 시도가 추구하는 목표이다. 초현실주의는 그것을 자신의 고유한 과제라고 불러도 좋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그 핵심 내용을 “범속한 각성”이라고 이름 지었다. 베냐민은 낡은 풍경에서 혁명을 보는 초현실주의자들의 태도를 짚으며 “대도시의 빈민구역에서 신에게 버림받은 일요일 오후나, 새집의 비에 젖은 유리창을 통해 첫눈에 경험하는 모든 것”이라며 범속한 각성을 이뤄내는“사물의 숨겨진 정조”의 예들을 들었는데, 홍상수 영화에서 사물의 정조 혹은 사람이 사물화되어 만들어지는 정조를 우린 수없이 열거할 수 있다. 지금은 <북촌방향>의 가장 아름다운 장면 하나로 대신하려고 한다. 술집을 나온 성준 일행(영화 속 배우들이 한 프레임에 등장하는 유일한 장면, 그리고 영화에 음악이 흐르는 유일한 장면)이 함박눈이 내리는 새벽에 다들 술에 취한 채 택시를 잡기 위해 난장판으로 서 있다. 누구는 비틀거리고 누구는 부축하고 누구는 갑자기 쏜살같이 튀어나간다. 각자의 흔들리는 시선과 잠깐씩의 멈춤과 방황하는 몸짓과 불만이 엿보이는 자태들이 담긴, 이 눈 내리는 새벽의 사물의 정조들 혹은 물질적 기표들의 무한한 파토스를 당신에게 미리 일러둔다. 그들은 꼭 술 취한 세잔의 사과들 같다. 뭇매를 맞을 말이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가 그렇지 못한가로 당신이 영화의 일상적 인간인가 아닌가를 내기 걸고 싶어진다. 그런데 집요한 홍상수는 이 아름다운 정조의 순간조차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시간의 차원에서 한번 더 뒤튼다. 그 결과물이 이 장면을 뒤로 돌리고 그러나 음악과 소리는 제자리에 두면서 완성된 <북촌방향>의 예고편이다. 이 예고편까지 더해야 <북촌방향>은 진정한 한편의 영화가 된다고까지 나는 말하고 싶어진다. 홍상수의 범속한 각성은 다름 아니라 다르게 쳐다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르게 본 걸 또 다르게 보며 그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그게 홍상수의 범속한 각성의 각성이다. 혁명을 위한 도취의 힘들을 얻는 것이 초현실주의자의 과제라면 생활의 발견을 위한 도취의 힘들을 얻는 것이 ‘홍상수라는 영화’의 필생의 과제다. 홍상수는 외국의 어느 강연에서 삶의 실체와 그 지각에 관하여 설명하기를, 사회자에게 물통 하나를 건네주며 “지금 우리가 이렇게 물통을 주고받으며 그 물맛에 관해 말할 순 있지만 몇년을 설명한다고 해서 그 물맛을 알 수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영화로 하고자 하는 건 실로 그 물맛의 실체를 비로소 맛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물이 시간이고 물통은 단단한 상투라고 해보자. <북촌방향>은 그 상투라는 물통에 작은 구멍들을 뚫어서 시간이라는 물맛을 보려는 꼬챙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구멍 사이로 흘러나오는 시간이라는 물맛을 본다. 한꺼번에 많이 다르게 보는 것은 홍상수에게 결단코 중요치 않다. 그런 건 혁명이다. 그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다르게 보는 건 또다시 상투와 통념을 끌어들여 기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의 영화에서 다르게 보는 것만큼 중요한 건, 조금 다르게 보기 혹은 조금씩 다르게 보기이다. 홍상수 영화는 많이가 아니라 반드시 조금이어야 하고 그 조금이 매번 전부이고 총력이다. 그가 그러고 나면 우리는 영화 속 성준의 말처럼 “그 조화를 느끼면 된다”. 가깝지만 아득하고 멀지만 통하는 것들이 곡선으로 돌고 또 휘면서 거리를 망실한 채 우주를 만드는 <북촌방향>으로 우린 그 시간의 조화를 느낀다. <북촌방향>이라는 이 진귀한 체험을 나의 언어로는 도무지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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