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에서 빠져나온 남자가 담배를 문다. 그를 뒤쫓아 나온 여자가 웃으며 말한다. “내가 여기 나오는 데에 몇 가지 우연이 작용했을까요?” 사실 남자가 기대한 여자는 그녀가 아니었고, 그래서 다소의 실망과 약간의 헛웃음이 교차되는 순간이지만, 이때 여자가 짓는 웃음과 그녀의 말투는 이 남자에게 새로운 기대를 심어놓는 듯 보인다. 여전히 ‘애교’라는 두 글자가 선명한 송선미의 느낌 때문일 것이다. 속이 뻔히 보이지만, 거부하고 싶지 않은 순간. 남자의 얼굴이 환해지는 건 당연하다. “평소 내 모습이다. 애교스러우면서도 장난기 있는 그런 거. (웃음) 나는 잘 몰랐는데, 영화를 본 누군가가 말하기를 <북촌방향>의 나는 순수해 보이기도 하고, 지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요부처럼 보이기도 했다더라. 내가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송선미가 <북촌방향>을 선택한 이유는 역시 ‘해변’의 기억 때문이었다. 홍상수 감독과 <해변의 여인>을 만들면서 느꼈던 “세포를 깨우는 자극과 신명”이 그녀를 북촌으로 이끌었다. “나이가 들고 그만큼 연기생활이 늘어나면서 더 그런 갈망이 많아지는 것 같다. 예전에 한 선배가 어떤 작품을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작업을 하고 싶다고 한 적이 있는데, 요즘에 와서 깊이 공감을 하고 있다.” <북촌방향>에서 송선미가 연기한 여자는 영화과 교수 보람이다. 물론 ‘미모’의 교수라는 게 중요하다. 그녀는 자신을 매우 아끼는(사실 사랑하는) 영화평론가 영호(김상중), 그리고 북촌에 놀러온 영화감독 성준(유준상)과 술을 마신다. 이때 영호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무심하게 대하는 송선미의 표정이 인상적이다. “사람의 마음을 은근히 갖고 노는 게 있는데, 좀 재밌더라. 한정식집에서 영호가 보람의 동의를 구하며 ‘무슨 뜻인지 알지?’라고 할 때, 보람이 ‘난 모르겠는데?’라고 하지 않나. 리허설할 때는 좀더 정색한 표정으로 연기했는데, 상중 선배가 민망해하셔서 촬영할 때는 약간 웃으면서 했다. 그게 오히려 더 얄밉게 보인 것 같다. (웃음)”
극중에서 영호는 보람에게 “넌 착해, 넌 재능이 많아. 남들이 부러워할 게 많아”라고 말한다. 송선미는 <북촌방향>을 네 번째 관람하면서 “사람들이 실제의 나와 대입해볼 수 있는 대사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슈퍼모델이었고, 큰 부침없이 안정적인 연기생활을 해왔고, 무엇보다 여전히 예쁘다. “그런데 사실 나는 오히려 여우처럼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잘 챙기는 편은 아니다. 스스로 이 사회를 살아가기에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열등감을 갖기도 했었다. <북촌방향>을 하면서 감독님이 ‘아직도 예쁜 걸 간직하고 있으니, 잘 간직해서 멋있게 나이가 들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그 때문에 좀더 나를 사랑하게 된 것 같다.” <북촌방향>이 이전 작품들과 달리 자신의 속내를 내보일 수 있는 기회였다는 것도 자신감을 갖게 해줬다. 주요 등장인물들이 함께 택시를 기다리던 장면을 주목해야 한다. 혼자 삐져나온 송선미가 비틀거리며 담배를 무는 모습은 찰나의 순간에도 보람이 지닌 피곤함과 사연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영화를 보니까 너무 리얼하게 나와서 당황했다. 실제로 술을 마시고 연기한 것도 아닌데, 너무 추해 보이더라. (웃음) 그런데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이다. 예전에는 대부분 곱게 자란 느낌으로 보여졌는데, 이제야 좀더 인간적인 모습이 보여진 것 같았다. 영화에서 내가 종종 짜증을 내는 소소한 부분들이 모두 나에게는 시원한 느낌이었다.” 송선미는 지금 <북촌방향>에서 느낀 만족감이 오히려 고민이 된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일하면서 자신을 흥분시킬 수 있었던” 느낌을 다른 작품에서도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다. “일단 고민을 제쳐두고 바람을 이야기하자면, 30년 뒤에도 지금을 추억하는 거다. 그때 되면 감독님도 머리가 더 희끗해졌겠지. 그래도 그때도 모여 같이 술을 마시면서 옛일을 이야기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싶다. (웃음)”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 홍상수의 영화가 점점 밝아지고 있다면, <북촌방향>은 가장 밝은 영화일 것이고, 송선미는 <북촌방향>의 가장 화창한 단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