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미아들의 안식처를 창조하다
2012-04-17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레드 로드> <폭풍의 언덕>의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

1961년생이니 적지 않은 나이다. 하지만 작품 수는 그에 비해 적은 편이다. 안드레아 아놀드는 영화가 아니라 방송 프로그램에서, 그것도 연출이 아니라 연기자로 자신의 경력을 시작했다. 1980년대, 그러니까 20대를 거치며 그녀는 이런저런 음악 방송과 아동용 방송을 기웃거렸지만 끝내 연기자로서 자신의 재능을 인정받진 못한 모양이다. 이후에 그녀는 미국영화연구소(AFI) 등을 거치며 영화연출의 길로 항로를 바꾸었고 몇편의 단편과 텔레비전 시리즈를 만든 다음 마침내 2006년에 <레드 로드>로 장편 데뷔하게 된다. 어쩌면 연기 인생에서의 그녀의 불운이 우리에게는 행운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2000년대에 데뷔한 유능한 여성감독 중 한명을 만나게 되었으니까.

그녀가 주변의 지인들에게 시나리오를 처음 보여줬을 때부터 <레드 로드>는 스릴러로 낙점됐던 영화다. CCTV 오퍼레이터가 직업인 재키는 어느 날 밤 우연히 모니터를 살피다 몇년 전 자신의 남편과 딸을 사고로 치어 죽인 사내를 발견하고 복수를 계획한다. 그러나 신분을 감춘 채 사내에게 접근한 그녀는 얼마 되지 않아 그를 향한 복수욕과 성욕을 더이상 구분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보통의 남성 스릴러영화에서라면 침묵에 부쳐졌을 ‘그녀의 목소리’를 경청했다는 점에서 일단 주목할 만한 데뷔작이었다.

안드레아 아놀드의 두 번째 선택은 의외였다. 그녀는 청춘영화 <피시 탱크>(2009)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마치 영국 특유의 과격한 청춘물 <스킨스>(영국 브리스톨에 거주하는 10대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한 텔레비전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그런 점에서 독창적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도시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을 꾸준히 다루어온 그녀의 장기가 나름 살아 있는 작품이다.

<폭풍의 언덕>

안드레아 아놀드의 세 번째 선택은 더 의외였다. 그녀는 세 번째 작품으로 <폭풍의 언덕>(2011)을 골랐다. 저 유명한 에밀리 브론테의 고전이기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지 못한다면 이내 실패작으로 취급받을 위험도 있었다. 그때에 안드레아 아놀드는 과감하게 몇 가지 결정을 내렸다. 먼저 히스클리프 역에 흑인 비전문배우를 기용했다. 둘째로 소설의 뒤쪽 절반을 포기하고 앞쪽 절반만 다루어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유년기를 최대한 상세하게 재현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섬세한 감수성이 어린 화자를 통해 제대로 빛을 발했으며 이 영화는 역대 어떤 <폭풍의 언덕>에 견주어도 가장 관능적이라 할 만한 장점을 갖게 됐다.

안드레아 아놀드는 애초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다. 팔색조의 본능이 있을 것이다. 스릴러, 청춘영화, 시대극을 격하게 오가는 것을 보면 일견 가늠해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런 아놀드의 종잡을 수 없는 관심사 속에서도 주목할 만한 영화적 교집합은 있다. 그녀가 집을 떠나 부유하는 인물들을 시종일관 잊지 않고 다루어왔다는 사실이다. 이제까지 아놀드가 만들어온 영화들은 기댈 곳 없는 미아(迷兒) 같은 존재들이 자신의 욕망을 발설할 수 있는 은신처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안드레아 아놀드는 그 미아들을 껴안으며 마침내 주목받는 감독이 되었다.

그녀의 사소한 비밀◆안무단

안드레아 아놀드는 1980년대 초 영국 <BBC>의 음악 쇼프로그램 <톱 오브 더 팝스>의 안무단 ‘Zoo’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데이비드 보위와 퀸이 함께 <Under Pressure>를 부르는 무대에서 흑백 분장을 하고 가만히 서 있는 병풍 중 하나가 그녀다. 자신의 말처럼 “언젠가 유튜브에 올라올지도…”.

사진 RE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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