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여성만의 시선, 놓치면 후회할 걸요
2012-04-17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글 : 김효선 (영화평론가)
4월19일부터 26일까지 열리는 제14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추천작 9편

은유적 로드무비의 탄생

◈<빛의 여행> Journey of Light
강연하 / 한국 / 2011년 / 99분 / HD / 컬러 / 드라마

떠나간 남자의 이름은 ‘재현’이고 남겨진 여자의 이름은 ‘빛나’다. 재현은 시인이고 빛나는 무명 배우다. 이유는 알 수 없고 어느 날인가 떠나간 재현으로부터 빛나 앞으로 소포 하나가 배달된다. 그 안에는 한적한 시골 마을, 파란 대문집 하나가 촬영된 CD가 들어 있다. 빛나는 이제부터 그 파란 대문을 찾아 혹은 애인 재현을 찾아 혹은 자기 자신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빛의 여행>은 그 여행길에 오른 빛나의 이야기이며, 빛나는 뭔가 사연에 얽혀 삼척항을 찾게 된 아일랜드 한국계 청년을 만나 잠시 동행하기도 한다. 주인공의 주변을 둘러싸는 풍경과 그 위로 흐르는 음악의 어우러짐이 인상적이다. <빛의 여행>에는 우회적인 상징 관계들이 곧잘 등장하며 전체적으로는 저음과 무표정이 주된 느낌을 이루고 그것으로써 은은한 은유적 로드무비를 완성하고 있다.

대중을 호도하는 유방암 캠페인

◈<핑크 리본 주식회사> Pink Ribbons Inc.
레아 풀 / 캐나다 / 2011년 / 97분 / 디지-베타 / 컬러 / 다큐멘터리

다큐멘터리 <핑크 리본 주식회사>는 분홍색 리본으로 상징되는 유방암 캠페인을 둘러싸고 재단과 기업들이 어떻게 자가당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는지를 샅샅이 파헤친다. 영화는 캠페인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기업과 재단 대표들, 열심히 축제와 모금에 참여하는 일반 대중, 그리고 이 캠페인의 허상을 경고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종종 교차편집하면서 유방암 캠페인 자체가 대중의 무지와 호기심을 자극하며 현실을 호도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캠페인에 참여해 기꺼이 연대의식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십시일반으로 모금한 돈이 실제 암 치료나 유방암 연구를 위해서 별로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충격적인 뉴스가 될 것이다. <핑크 리본 주식회사>는 비단 유방암 캠페인뿐만 아니라 긍정의 슬로건을 단 모든 피상적인 운동들을 다시금 되돌아보도록 만든다.

중국의 현실을 비꼬는 우화

◈<그녀가 본 유에프오> UFO in Her Eyes
궈샤오루 / 독일 / 2011년 / 106분 / 35mm / 컬러 / 드라마

궈샤오루가 자신이 쓴 동명의 영어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중국의 한적한 산골 마을, 30대 중반의 미혼여성 곽윤은 다소 투박한 외모와 강인한 체력을 지닌 평범한 농부다. 마을의 교장선생님과 밀회를 즐기던 어느 날, 곽윤은 유에프오를 목격하고 뱀에 물린 미국인 사업가를 구해주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소식을 들은 촌장은 유에프오를 이용해 지역 경제를 부흥시킬 궁리에 빠지고, 때마침 베이징에서 급파된 비밀경찰은 마을 사람들을 심문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본 유에프오>는 자본주의 물결이 넘실대는 중국의 복잡한 정치상황을 꼬집는 한편의 우화다. 영화는 이민자들에 대한 탄압과 배타주의, 해외자본에 대한 종속과 이권다툼, 그리고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파괴와 주민들의 생존권 박탈 등 중국에 현존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가상의 사건 주위로 끌어모아 신랄한 풍자를 가한다. <X파일>과 <라쇼몽>을 연상시키는 심문 시퀀스들로부터 노아의 방주를 암시하는 마지막 기구 장면까지 영화에는 재미있는 설정과 디테일들이 많다.

대지진 이후 여성들의 삶

◈<3·11 여기에 살아> 3·11: In the Moment
가샤 교코 / 일본 / 2011년 / 90분 / 디지-베타 / 컬러 / 다큐멘터리

지진이 발생하고 4개월 뒤, 잔해를 옮기는 포클레인은 여전히 분주하고, 처참한 집터를 돌아보던 아주머니들은 끝내 눈물을 보인다. 영화는 3·11 일본 대지진의 물리적인 상처를 먼저 돌아본 뒤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여성들을 차분히 좇아간다. 오늘도 며느리를 위해 향을 피우는 아주머니, 피난센터에서 의욕적으로 할머니들을 보살피는 중년의 여성, 방사능 검사가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연구원, 집을 잃고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 그리고 팔을 걷어붙인 자원봉사자들이 그 주인공이다. 분노와 절망이 있을 법한 자리에서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운동을 하며, 함께 꿈을 꾼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더 강하게 견디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영화는 이들의 의연한 일상에 대해 줄곧 담담한 자세를 유지하지만, 가끔은 그 거리감 때문에 사람들의 깊은 슬픔이 역설적으로 잘 전달된다. “울지 말아요. 오늘은 중요한 날”로 시작하는 노래를 할머니들과 함께 수화로 부르는 피난센터 장면이 그 예다. 영화는 사람들 각자가 새해를 맞는 광경을 보여주면서 끝이 난다. 기억이 고통스러워 앞만 볼 수밖에 없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 여기를 사는 것이 소중하다는 마지막 메시지도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일본의 대표 배우에서 감독으로

◈<가슴이여 영원히> The Eternal Breasts
다나카 기누요 / 일본 / 1955년 / 110분 / 35mm / 흑백 / 드라마

물론이다. 다나카 기누요라면 일본영화 황금기 시절을 대표하는 그 여배우다. 오즈 야스지로의 <대학은 나왔지만>에서 첫 주연을 맡은 뒤 <바람 속의 암탉> 등 오즈의 영화에 10편이나 출연했고 무엇보다 <오하루의 일생> <우게츠 이야기> <산쇼 다유> 등을 포함해 14편에 달하는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1949년에서 50년으로 넘어가는 그 겨울에 할리우드를 방문했던 다나카 기누요는 이다 루피노 같은 할리우드 여배우이자 여성감독을 자신의 모델로 삼기로 마음먹는다. 그렇게 하여 1953년 작품 <러브레터>로 감독 데뷔하여 일본영화 역사상 두 번째 여성감독으로 이름을 올린다. 대표작은 이 작품 <가슴이여 영원히>.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뒤로하고 친정으로 돌아온 주인공 후미코는 시인으로서 새 삶을 시작할 찰나였는데, 그때 별안간 유방암이라는 치명적인 병마가 찾아온다. 소박한 리얼리즘의 분위기로 시작한 이 영화는 주인공 후미코의 삶의 애환, 육체를 둘러싼 고통과 공포와 소망 등이 뒤섞이며 한편으로는 공포스럽게 또 한편으로는 에로틱하게 흘러간다. 당대의 페미니스트 작가 다나카 스미에가 각본을 맡았다

원전에 반대합니다

◈<잿더미에서 본 희망> Ashes to Honey
가마나카 히토미 / 일본 / 2010년 / 116분 / DV / 컬러 / 다큐멘터리

이와이 섬에는 자랑거리가 많다. 관광객이 몰려들 정도로 유구한 전통을 자랑하는 마을 축제가 있고, 섬 주변에는 각종 희귀생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마을의 특산품인 해조류는 언제나 반응이 뜨겁다. <잿더미에서 본 희망>이 이와이 섬의 자연, 문화, 생활의 면면을 공들여 소개하는 이유는, 이들이 모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이와이 섬에 어울려 사는 약 500명의 주민들은 지난 28년간 원전 건립을 저지하는 지루한 투쟁을 이어왔다. 오늘도 마을 주민들은 공동체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고기잡이배를 이어붙여 편대를 짜고, 확성기에 대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버지의 투쟁을 자식이 이어가고, 투쟁을 통해 또 그 자식의 미래를 꿈꾸는 주민들의 담담한 노력은 그 자체로 깊은 감동을 전한다. 영화는 주민들이 벌이는 싸움의 정당성을 차분히 설파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친환경적인 에너지를 상용화한 훌륭한 예들을 친절하게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원전을 유일한 대안처럼 강요하는 정부와 기업, 이를 방관하는 대다수의 국민이 주목해서 보아야 할 대목이다. <잿더미에서 본 희망>은 감동과 정보, 그리고 교훈이 공존하는 한편의 인류학적 보고서라고 할 수 있겠다.

러시아 진보 저널리스트에게 보내는 편지

◈<자유의 쓴 맛> A Bitter Taste of Freedom
마리나 골도브스카야 / 스웨덴 / 2010년 / 86분 / 디지-베타 / 컬러 / 다큐멘터리

<자유의 쓴 맛>은 마리나 골도브스카야 감독이 모스크바의 진보언론 <나바야 가제타>의 취재기자 안나 폴리코브스카야에게 뒤늦게 바치는 연서다. 푸틴 치하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대변인을 자청하며 끈질기게 부정부패를 캐냈던 안나는 정치권 인사들에게 거슬리는 존재였다. 방해가 되는 언론인에게 서슴없이 마피아식 보복을 가했던 당시 러시아 정부에 의해 결국 그녀는 2006년 10월7일 자신이 살던 아파트 입구에서 피살당했다. 그녀에게 감독은 그녀가 살아 있는 동안 기록해두었던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수취인불명의 편지를 써내려간다. 지적할 만한 점은 감독이 안나를 저널리스트나 액티비스트로만 그리지 않고 누군가의 연인 혹은 어머니 혹은 딸로서의 그녀를 균형있게 담아냈다는 사실이다. 인간으로서의 그녀에 대한 친밀감을 강조한 감독의 선택은 적절하다. 때때로 천진한 얼굴로 사랑하는 남자에 대해 혹은 일상적으로 경험한 시시콜콜한 사건에 대해 떠들며 웃음 짓는 그녀를 보노라면 그녀가 대의에 복무하는 대중적 영웅이기 이전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자 한 한 인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그녀가 지금 여기에 없다는 사실을 더욱 서글프게 여기게 한다.

식물은 또 다른 주인공

◈<허브치료사> The Good Herbs
마리아 노바로 / 멕시코 / 2010년 / 118분 / 35mm / 컬러 / 드라마

싱글맘 달리아에게는 사랑스런 아들 코스모와 식물학자인 엄마 라라가 있다. 어느 날 라라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게 되고, 그녀의 병세가 두드러지면서 달리아의 불안도 늘어간다. <허브치료사>는 이들 모녀와 이웃에 살고 있는 여성들의 삶의 흔적을 세심하게 그러모은 영화다. 멕시코를 대표하는 여성감독 마리아 노바로는 이 영화에서 마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스타일로 비극적 순간을 유려하게 포착해낸다. 라라의 삶의 일부이던 식물은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기도 하다. 목련과 나팔꽃씨 같은 각종 식물의 그림과 효능이 마치 소제목처럼 스토리의 구획을 나누고 있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식물을 클로즈업한 인서트가 러닝타임 내내 지속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바람에 날리는 꽃씨, 미세한 떨림을 이어가는 이파리, 그리고 각종 희귀식물과 곤충을 담은 화면은 때마다 인물의 심리와 긴밀히 조응하며 신비로운 정서를 만들어낸다. 이들 이미지들을 보고 달리아의 이웃들이 부르는 나직한 노래를 듣고 있자면, 눈앞에 펼쳐진 공간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을 것 같다. <허브치료사>가 일으키는 이 모든 감각들은 생의 쓸쓸한 상처들에 대해 차분하고 따뜻한 위로를 이어간다.

동경과 향수를 향한 수다

◈<스카이랩> Le Skylab
줄리 델피 / 프랑스 / 2011년 / 113분 / 35mm / 컬러 / 드라마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의 줄리 델피만 알고 있는 관객에게 마땅히 소개해야 할 영화다. 어느덧 장편만 4편을 감독해 기성감독의 대열에 오른 그녀는 전작들에 이어 이번에도 다소 수다스러운 작품을 내놓았다. <스카이랩>에서 알베르틴은 1979년 여름으로 기억을 되돌린다. 주말 동안 브르타뉴에 사는 할머니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가족들은 서로에 대한 크고 작은 폭로를 일삼는다. 그렇게 ‘나도 알 만큼 알아요’라며 으스대는 아이들의 세계와 지리멸렬한 현실에 대해 좌파 우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는 어른들의 세계가 병존하는 가운데, 언제 어디에 불시착할지 알 수 없는 고장난 인공위성 ‘스카이랩’에 관한 뉴스가 SF적 농담처럼 드문드문 박혀 있다. 전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코미디’를 표방하는 영화다. 특기할 만한 점은 베트남전쟁 등으로 인해 정치적 담론이 활발했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과 델피가 어렸을 때 실제로 살았던 곳으로 돌아가 당시를 떠올리며 만든 영화라는 사실이다. 그 덕인지 이 영화에는 과거에 대한 동경과 향수가 짙게 남아 있다. 누벨바그 세대의 흔적이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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