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2012년, 향후 몇 십년을 내다보는 영화용어사전이 새로 발간된다면, ‘여성영화’라는 항목은 과연 어떤 규정들로 다시 설명될 수 있을까. 남성의 시각적 쾌락의 대상에서 벗어나 여성이 응시와 재현의 능동적인 주체가 되어 서사적으로, 형식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영화관습에 대항하는 영화. 여성영화에 대한 논쟁이 여성운동의 일환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 1970년대라면, 이런 정의들은 전략적으로 시의적절하고 명징하며 미학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전복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동시대의 어떤 영화들을 그 범주 아래, 일렬로 나열하는 것은 가능한가. 아니, 그런 작업이 여전히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좀 냉정해질 필요가 있다. 지난날, 영화 안팎에서 적극적인 담론으로 활동하던 ‘여성영화’라는 개념은 4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 이르러, 영화의 변화, 여성의 변화에 무심한 채, 종종 영화 자체에 대해 그 무엇도 말해주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용어로 소비되는 현실 또한 분명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건 ‘여성영화’라는 범주의 모호함이 대면할 수밖에 없는 난점들에 어느 정도 기인하는 것이기는 하다. 우선 ‘여성영화’는 인종, 계급, 섹슈얼리티가 제각기 다른 여성들의 영화를 하나로 포괄하는 상위 개념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여성’이 아닌 다른 범주가 이들을 더 밀접하게 묶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성이 만들고 여성이 출연하고 여성 관객이 향유한다는 사실이 영화가 여성적 시선을 견지한다는 사실과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는다. 여기에는 생각보다 복잡한 층위가 얽혀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성적’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에 대한 근본적인 차원의 질문과 마주할 수밖에 없다. 그 질문은 결국 섹스(생물학적 성)와 젠더(사회적인 성)의 구분에 대한 복잡한 논의들에까지 닿게 되지만 그렇다 해도 ‘여성적’인 시선이 명확히 규명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일반적인 수준에서 이야기하자면, 쉽게 재현될 수 없는 것, 그 어떤 이데올로기로도 소급될 수 없는 것, 그것은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남성 중심적인 재현을 비판하며 주장한 진정 ‘여성적인 것’으로, 이 재현 불가능한 영역을 상징계의 언어에 기대지 않고 탐험하는 것이 여성영화의 힘이라고 이해되어왔다.
여성적인 것과 반여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이 본질적인 무엇으로 고정되고 실체화되지 않으면서 재현되고 설명되어야 할 어려운 영역이라면, 우리는 좀더 쉬운 영역을 알고 있기는 하다. 여성적인 영화를 규정하는 일은 어렵지만,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반여성적인 영화를 골라내는 건 쉽다. 영화에 있어서 반여성적인 혐의들은 언제나 상투적이고 획일적인, 이미 맥락화된 시선과 장치를 통과하기 때문에 아무리 영화의 ‘대의’가 훌륭해도 판단하기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화의 여성적인 것이란 결국 반여성적인 것의 부정으로서만 존재하는, 구체적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장소라고 여겨야 할까.
하지만 ‘여성영화’라는 범주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길 망설이면서도, 우리는 어떤 영화를 보는 동안만큼은 여기, 그곳에서만 가능한 무언가 다른 결이 일렁이고 있다는 걸 체험하게 된다. 그 체험은 ‘여성영화’를 수식하는 현실의 무력한 언어들을 압도한다. 한정된 영화적 시간을 부서질 듯한 여성의 심리적 변화에만 온전히 의지한 채 진행되는 아녜스 바르다의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를 본 다음, 우리는 아무리 위대한 율리시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그 도시와 거리의 숨결의 미학을 결코 복제할 수 없음을 믿게 된다. 혹은 클레르 드니의 <초콜릿>과 <백인의 것> 속, 식민주의, 백인, 여성이라는 첨예한 위치에서 탐구된 아프리카의 육체성을 경험하고 나서는, 그 땅에 매혹되었던 수많은 남자 감독들의 피상적인 접근에 대해 비웃지 않기란 어렵다. 혹은 샹탈 애커만이나 카트린 브레이야의 영화들을 보는 동안, 섹슈얼리티의 신비롭지 않은 밑바닥까지 이처럼 과격하게 난도질하면서도 동시에 착취하지 않고 품어 안으려는, 남자감독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시선에 우리는 격하게 동화된다. 혹은 마르지예 메쉬키니의 <내가 여자가 된 날>에서 이란 여성들의 억압받는 삶이 단순한 피해자가 아닌, 고통의 시(時)적 주체로 형상화될 때, 그 여성들의 현실에서는 결코 허락되지 않는, 그래서 더욱 소중한 영화적 활기에 감동할 수밖에 없다. 혹은 가와세 나오미의 작품들을 따라가며, 우리는 여성에게 영화가 사적 일기에서 시작해서 세계를 확장하며 성장해가는 치유의 과정이 될 수 있음을 목도하고, 영화라는 그 치열한 거울을 끌어안고 싶어진다.
남성 중심 사회에는 없는 언어와 감각
말하자면 ‘여성영화’에 대한 위와 같은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그것의 존재가치를 버릴 수 없다면 바로 그 체험적 차원에서, 즉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서 언어를 가져본 적이 없거나 언어를 잃고 수면 아래에 맴돌던 것들이 마침내 수면 위로 떠오른 순간, 보는 이의 몸으로 전이되는 그 폭발력과 절실함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 여성감독들의 영화적 근거지는 단일 국가와 민족, 혹은 계급, 인종이기 이전에, 혹은 그 모든 것들이 들끓는 그녀들 자신의 육체이다. 고통받고 분열하고 욕망하는 그 육체를 사회적 질병으로 낙인찍고 영화에서도 그대로 질병화하는 주류영화들과 달리, 이들은 그것을 질병으로 호명하지 않고 남성 중심적인 세계를 버티는 영화언어로 전환한다. 그때, 광기, 우울증, 히스테리, 과잉, 결핍 등은 알레고리적으로 해석되기 이전에 이미지 그 자체의 당당한 활동으로 꿈틀거린다. 그 꿈틀거림은 세계의 병적 증상이 아니라, 현실과 그 너머, 사적인 삶과 사회 제도를 포괄하며 새롭게 감각된 세계 그 자체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 것 같다. 욕망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여성들의 욕망을 영화는 어떻게 욕망할 것인가. 이 시대,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 ‘여성영화’는 욕망의 이러한 중층적인 작용을 기꺼이 수행하는 영화들이다. 여성영화의 역사에서 여성을 욕망의 대상에서 욕망의 주체로 만드는 일이 중요했던 이유는 누가 지배의 자리를 선점할 것인지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그때 지배와 피지배, 주체와 타자의 경계에 생긴 틈에서 세계의 새로운 욕망이 열릴 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지난 20여년간 여성영화의 모범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었을 영화, 마를렌 고리스의 <안토니아스 라인>이 여전히 진부하지 않다는 데 동의한다면, 그건 영화가 구현하는 모계사회적인 대안가족의 형상이 놀라워서가 아니다. 가부장적 체제의 도덕, 관습, 규율을 먼지처럼 가볍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저항양식은 오직 욕망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 그 욕망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성 4대에 걸친 서사가 삶과 죽음을 거듭하며 깨우치고 설득해서다.
여성이라는 정체성의 갱신
여성영화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아니, 그 범주는 유효한가, 존재한다고 해도 규정하는 것은 가능한가, 에 대한 의문에서 이 글은 시작되었으나, 결론에 이르러 우리는 더 많은 ‘여성영화’가 만들어지기를 응원하는 일이 지금 더 간절하다는 걸 깨닫는다. ‘여성영화’라는 모호한 영역을 보다 안정적으로 공고히 다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적’이라는 말로 수렴되는 모든 테두리를 수많은 결들로 분화하고 파열시키는 욕망의 창들, 그 창을 필사적으로 찾아 껴안는 것은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욕망과 다르다. 그리하여 영화와 이 세계에 더 많은 가능성의 조건들을 개진하고 그렇게 욕망과 가능성으로 연대하여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것. 갱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 세계만큼은 아직도, 여전히 ‘남성영화’로서는 감히 탐낼 수도, 도달할 수도 없는 ‘우리만의’ 영역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