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적으로 흐르는 인물의 감정을 차분히 주시하도록 만드는 영화들이 있다. 말레이시아 감독 탄추이무이의 데뷔작 <사랑은 이긴다>(2006)가 그런 경우였다. 낯선 사내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그에게 이용당하는 여인의 이야기. <사랑은 이긴다>는 신파적인 설정을 넘나드는 다소 설익은 느낌의 작품이었지만, 뜨거운 감정이 남긴 초라한 잔해에 쉽게 연민을 보이거나 냉소하지 않는 단단한 영화이기도 했다. 이 영화로 탄추이무이 감독이 부산영화제와 로테르담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지도 5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지금 탄추이무이는 동료들과 설립한 다후앙 픽처스의 핵심 일원으로서, 그리고 말레이시아 독립영화계를 이끄는 감독이자 프로듀서, 작가로서 활발히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다.
탄추이무이의 영화에는 힘든 현실조건 가운데 수동적인 패배자로 남은 캐릭터들이 두드러진다. 단편 <탄중말림의 나무 한 그루>(2005)의 남자주인공은 심지어 캐릭터의 이름이 “아름다운 루저”다. 그는 자신을 좋아하는 한 소녀로부터, 버스에서 잘못 내린 낯선 곳에서 꽃잎이 흩날리는 나무 한 그루를 보게 되었다는 경험담을 듣게 된다. 소녀는 그에게, 원하는 곳에 닿지 못해도 나름의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다는 서툰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소녀의 위로에는 좀 감상적인 구석이 있지만, 영화 역시 순진한 낙관에 그치는 것은 아니다. 소녀도, 그리고 관객도, 바닥에 떨어진 꽃잎에 결국 진흙이 묻고 그마저 쓸려버릴 것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탄추이무이는 캐릭터들의 움직임을 매우 오랫동안 화면에 담는 편이다. 그녀는 인물이 신발을 갈아신고, 문을 여닫는 것 같은 사소한 행위를 다 보여주며 그 시간을 관객이 함께 체험하도록 만든다. 이때 긴 호흡 속에 녹아드는 것은 어리석고 서툰 행동에 놓인 진심이다. 그리하여 비록 꽃잎이 흩날리던 아름다운 광경은 사라졌어도, 두 주인공이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노래한 긴 시간들은 아련한 잔상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2010년 탄추이무이는 고향인 어촌에 돌아와 두 번째 장편 <여름이 없었던 해>를 만들었다. 감정의 결을 세심히 담아내는 감독 특유의 리듬은, 이 영화에서 차분히 밀려오고 쓸려나가는 바다의 조류와 완벽히 조응하고 있다. 롱테이크 숏은 여전하지만 시간의 폭은 더 커졌다. 보름달이 비추는 바다 한가운데에 배를 띄우고 세 남녀가 낚시를 하는 장면에서, 이들의 현재는 기억과 설화의 세계까지 아우르며 마술적인 시간 속으로 편입된다. 영화의 후반부는 아픈 과거를 복원해내는데, 당시의 좌절된 열망도 현재의 고단함도 시간의 조류를 타고 결국은 하나의 전설로 남게 된다. <여름이 없었던 해>는 상실의 자리에서 아름다움을 보고자 하는 감독의 의지가 원형적인 서사를 통해 구체화된 작품이다. 때로 감독이 화면에 부여한 의미들이 영화적 호흡을 선행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적어도 이 두 번째 장편이 탄추이무이의 스타일과 문제의식을 보다 깊이있게 확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언론에 노출된 탄추이무이는 도전과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근작에서 확인된 진지한 도전의식은 그녀의 영화 세계를 앞으로 더 단단하게 만들어줄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탄추이무이의 다음 장편을, 그녀가 담아낼 새로운 루저들의 사연을, 기다리고 또 주목하게 만든다.
그녀의 사소한 비밀◆브뤼노 뒤몽
존경하는 감독에게 자신의 첫 장편영화에 대한 소감을 묻는 건 어떤 기분일까. 부산영화제에서 탄추이무이는 브뤼노 뒤몽으로부터 <사랑은 이긴다>의 첫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1년 뒤, 그녀는 한 인터뷰에서 그 장면이 뒤몽이 좋아했던 유일한 부분일지 모른다는 의혹(?)을 제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