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악마를 만났다? 알려졌다시피 박훈정 감독은 <혈투>(2011)로 데뷔하기 전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2010)와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2010)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쓴 주인공으로 알려지면서 제법 유명세를 탔다. 충무로 감독들 중에서 장르적 감식안으로 치자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감독을 단숨에 매료시킨 작가였던 것. 그런 그가 두 번째 작품 <신세계>를 통해 자신이 창조한 악마 ‘장경철’을 연기했던 최민식과 조우하게 됐다. <악마를 보았다>를 지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로 새로운 전성기를 맞은 최민식은 <신세계>가 투자 등 난항을 겪다 NEW가 최종 투자를 결정하기까지 묵묵히 의리를 지켰다. “<악마를 보았다>의 작가로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비상한 재능을 지닌 친구라고 생각했다. 무조건 같이 하자고 했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러고 보면 <신세계>의 또 다른 주인공 황정민은 <부당거래>의 비리 경찰 ‘최철기’였다. 참 흥미로운 관계망이다. 자신이 이전에 썼던 시나리오의 주인공들을 이렇게 자신의 영화로 한꺼번에 만나게 된 경우가 또 있을까. 그것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비밀잠입경찰 소재의 본격 액션누아르
<신세계>는 국내 최대 범죄조직에 잠입한 형사 이자성(이정재)과 그의 정체를 모른 채 친형제처럼 아끼는 조직의 2인자 정청(황정민), 그리고 잠입수사 작전을 설계하고 조직의 목을 조이는 형사 강 과장(최민식) 사이에 벌어지는 의리와 배신, 음모의 드라마다. 조직의 넘버2인 정청은 자성의 정체를 모른 채 그를 아껴 조직 깊숙이 끌어들이고, 강 과장은 그를 전체 설계도의 꼭두각시 정도로만 여긴다. 그렇게 자성은 깡패도 아닌, 경찰도 아닌 남자로서 살아간다. 이처럼 <신세계>는 언더커버(비밀잠입경찰)를 소재로 한 본격 액션누아르영화다. 박훈정 감독이 쓰고 연출했던 모든 영화들이 ‘누아르풍’이었다면 드디어 갱스터와 만났다. “누아르 하면 갱스터 장르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세계>는 내 작품 중 가장 ‘장르적’이고 ‘상업적’이다. 장르 지향적인 데서 오는 본격적인 재미가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얘기다.
박훈정 감독이 축조한 세계는 빈틈없이 무척이나 팽팽하다. <악마를 보았다>와 <부당거래>, 그리고 <혈투>에 이르기까지 개성 강한 남성 캐릭터들의 극한 대립과 선악의 무참한 붕괴 등 그 출구를 찾기 위해 인물들로 하여금 무슨 일이라도 하게끔 만든다. <부당거래>의 주양(류승범), 최철기(황정민), 장석구(유해진)가 순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접촉과 반목을 거듭할 때 발생하는 날선 재미가 그 세계의 핵심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세계> 역시 <부당거래>와 <혈투>에 이은 박훈정의 ‘세 남자 이야기’다. “한번도 의식해본 적은 없는데 어쩌다보니 늘 그렇게 됐다. 구도 면에서 보면, 가위바위보 할 때도 그렇고 물고 물리는 재미가 세 사람일 때 극대화되는 것 같다. <스타크래프트>도 세 종족이라서 재밌는 것 아닌가. (웃음) 실제 정치나 조직세계를 봐도 캐스팅보트를 가진 제3의 세력이 어느 쪽에 붙느냐, 하는 게 무척 흥미롭다. <신세계>의 재미도 그런 데서 나온다”라는 게 그의 얘기다.
‘건달들이 정치하는 영화’
그럼에도 <신세계>는 이정재가 연기하는 언더커버 캐릭터에 가장 관심이 쏠린다. 조니 뎁의 <도니 브래스코>(1998) 등 수없이 변주돼온 흥미로운 갱스터 장르의 소재이기도 하다. “제 삶이 아닌 위장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아닌가.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이야기다. 영화 속 대사로도 나오지만,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 잠꼬대하면서 자기 정체가 탄로날 수 있으니까. 마약담당 수사관이면서 우연한 기회에 잠입경찰로 발탁돼 마약상으로 살아가는 그에게는 매일매일 투쟁의 연속이다. 그런 그를 두고 조직간의 음모와 대결이 겹쳐진다”는 게 그의 얘기다. 그를 통해 야심적으로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표 지점은 ‘한국형 에픽 누아르’다. “예전에 달시 파켓이 <씨네21>에 <대부>와 <흑사회>를 예로 들어 ‘우리는 과연 한국 갱스터 에픽을 볼 수 있게 될까?’라며, 단순한 갱스터물이 아닌 에픽 누아르에 대해 쓴 글을 아주 인상 깊게 읽었다. 개인의 삶의 궤적에만 천착하는 게 아니라 거대한 조직간의 대립과 ‘패밀리’의 역사, 그 성공과 몰락을 통해 복잡한 관계성뿐만 아니라 권력 그 자체의 메커니즘을 들여다보는 거시적인 관점의 영화를 꿈꾼다고나 할까. 그래서 <신세계>에 대해 어떤 영화냐고 물어보면 늘 ‘건달들이 정치하는 영화’라고 답하곤 했다.”
‘수도권에서 머물렀던 적이 없다’는 <신세계>는 대부분 부산에서 촬영이 진행됐으며 강원도 태백, 전남 여수 등지의 촬영 분량을 마무리하는 대로 9월 중순경 크랭크업할 예정이다. “90% 정도 촬영이 끝났는데 남은 10%가 중요하며 ‘센’ 시퀀스들이라 여전히 긴장하고 있다”는 게 그의 얘기다. <신세계>는 언더커버 개인의 얘기처럼 느껴지지만 여러 세력이 끼어들어 더 큰 싸움이 되고, 서로 약점을 잡고 이용하려들며 물고 물리는 가운데 그것은 더 거대한 정치적 싸움으로 번져간다. 한국 갱스터 누아르의 신세계가 그렇게 열리고 있다.
충무로 1급 스탭 총출동
최민식과 황정민, 그리고 이정재가 맞부딪히는 배우들의 삼각구도도 화려하지만 <신세계>가 내세우는 강점은 바로 ‘드림팀’이라 불러도 좋을 스탭들의 면면이다. 할리우드에서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를 촬영하고 돌아온 정정훈 촬영감독, <악마를 보았다> <친절한 금자씨>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의 조화성 미술감독, <모던보이> <박쥐> <만추> <후궁: 제왕을 첩> 등 조상경 의상감독 등 거의 이른바 ‘박찬욱 사단’으로 불리는 베테랑 스탭들이 <신세계>를 떠받치고 있다. 음악 역시 박찬욱 감독의 단짝인 조영욱 음악감독이 지휘하고 있다. 또한 “두 세력간의 ‘전쟁’을 그리되 과장되지 않은 현실감있는 액션”이라는 감독의 주문을 받은 이는 서울액션스쿨의 허명행 무술감독이다. 박훈정 감독이 “연출은 1급이 아닌데 배우와 스탭들이 1급으로 붙었다”고 우스갯소리를 할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