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밤 악몽을 꿨다.” 지난 6월 말 독일 베를린과 라트비아에서의 촬영을 마치고 돌아온 류승완 감독은 마치 ‘멘붕’ 상태처럼 느껴졌다. 대화 속에서 영화의 소재가 지닌 특별한 무거움, 그리고 오랜 해외 로케이션 촬영의 압박감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유럽 현지 프로덕션 서비스를 비롯해 현지 배우, 스탭들과 한데 섞여 만들어나가는 작업이 생각보다 만만찮았다. “어느 날은 잠꼬대로 ‘분량을 다 못 찍었어!’라고 소리 지르며 벌떡 깨기도 했다. 현장에서 거의 반 미친 상태로 하루 종일 악만 쓰다 온 것 같다”고도 했고 “외국 생활 함부로 할 게 못되더라”라는 농담도 건넸다.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몸무게가 50kg대로 뚝 떨어졌다고 하니, 말장난을 좀 하자면 영화 속 ‘버림받은 첩보원’의 처지가 그대로 전이됐다고나 할까. 나중에 완성된 영화가 가져다줄 쾌감을 미리 떠올리기엔 여전히 긴 작업이 남았다.
음습한 베를린 + 남북한 관계
10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인 <베를린>은 베를린을 배경으로 예상치 못한 음모에 휘말린 채 서로를 쫓게 된 세 남자와 한 여자의 첩보액션드라마다. 베를린을 주요 거점으로 북한쪽 비밀계좌를 추적하던 남한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는 불법 무기 거래 현장을 감시하던 중 표종성(하정우)의 존재를 알게 된다. 신분이 노출되지 않은 채 일명 ‘고스트’라 불리는 표종성은 북한 최고 요원 중 하나다. 하지만 표종성을 감시하기 위해 스파이 색출 전문의 냉혹한 동명수(류승범)가 베를린에 파견된다. 확실한 정보에 따라 표종성을 망명 계획 중인 이중간첩으로 의심하게 된 것. 그렇게 그는 남과 북 양쪽으로부터 쫓기는 운명이 된다. 한편, 표종성에게는 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에서 통역관으로 일하는 아내 련정희(전지현)가 있는데 그녀는 남편에게조차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는 비밀스런 여자다.
<베를린>에는 류승완 감독이 지난해 <부당거래>로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되며 느꼈던 실제 베를린의 을씨년스런 기운, 그리고 역시 지난해 방송된 MBC 특별 다큐 <타임>에서 ‘간첩’편을 연출하며 여러 탈북자와 간첩을 만났던 경험의 ‘톤 앤드 매너’가 담겨 있다. 물론 그 인상에는 ‘본’ 시리즈나 존 르 카레의 소설에서 연상되는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같은 느낌의 첩보액션물이 깊이 겹쳐진다. 크랭크인 전부터 ‘공간의 정서’를 거듭 강조했던 그이기에 출국 전과 후의 느낌에 대해 물었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유럽 도시의 이미지라는 게 있는데 희한하게 베를린은 그런 게 하나도 없더라. 어쩌면 우리가 알던 이미지는 상상 속의 베를린일 수 있다. 안 가본 사람들이 그리는 베를린 이랄까. 거기에 이번 영화의 특수성이 더해지니 뭔가 좀 묘한 느낌이 생겼다”는 게 그의 얘기다. “아직 다녀온 느낌이 정리되지 않았다. 정말 나 스스로 이상하다고 느낄 정도로 <베를린>에는 뭔가 좀 특별한 느낌이 있다. 지난 촬영 분량을 편집하고 다시 들여다보면서 감정이 제자리를 찾을 것 같다”고도 덧붙였다. 어딘가 이곳의 무더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베를린의 한기(寒氣)가 느껴지는 대답이었다.
<도둑들> 캐스팅 못지않다
<베를린>은 추운 유럽을 무대로 남과 북의 요원들이 쫓고 쫓긴다는 핵심적인 ‘하이 컨셉’이 너무나도 명료하다. 더군다나 하정우, 한석규, 류승범이라는 세 사람의 조합은 그 존재만으로도 압도적인 긴장감을 뿜어낸다. 거기에 <도둑들>을 통해 새로이 주목받은 전지현까지 가세했으니 <베를린>은 내년 상반기까지 이어지는 개봉 기대작 중 가장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한다. 베를린의 번잡한 기차역과 브란덴부르크 문, 그리고 각 잡힌 대사관과 유대인 학살 추모비 등을 무대로 그들이 펼치는 호흡은 상상만으로도 짜릿하다. “음습한 추위가 가득한 영화에서 그들의 뜨거운 입김을 보는 재미”가 바로 그것이다. 류승완 감독의 단짝인 정두홍 무술감독이 지휘하는 액션 설계도 당연히 기대를 모으는 부분이다.
<부당거래>의 세 남자는 철저히 자기가 속한 조직에서 ‘왕따’처럼 느껴지는 인물이었다. 주양 검사(류승범)나 최철기 형사(황정민)도 그랬고, 조폭 장석구(유해진) 역시 갑작스레 성장하며 주변의 견제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배경이 그들의 대립과 화해를 더욱 다이내믹하게 만들었다. <베를린>이 얘기하는 ‘요원들의 고독과 비애’도 아마 그런 것일 거다. 어디에도 기댈 곳 없고 함부로 무언가를 발설할 수도 없으며 늘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처지다. 거기에 남북한의 정치적 역학관계가 겹치며 만들어질 거대한 소용돌이는 어떠할까. 어쨌건 그것은 류승완 감독이 말하는 ‘사실감과 속도감이 넘치는 한국형 첩보액션영화’라는 장르적 재미와도 조화를 이룰 것이다. <베를린>은 베를린에서 2주, 라트비아에서 3주가량 촬영을 진행하며 70% 정도 분량을 마무리했고 현재 남양주종합촬영소에서 9월 초 크랭크업을 목표로 한창 막바지 촬영 중이다.
또 다른 해외 촬영지, 라트비아
<베를린>은 당초 독일 베를린에서 올 로케이션으로 촬영할 계획이었지만, 예산 등의 이유로 라트비아를 새로운 촬영지로 추가했다. 지난 6월 초에는 이미경 CJ E&M 총괄 부회장이 응원차 라트비아를 다녀가기도 했다. 라트비아는 유럽 북동부 발트해 연안에 있는 공화국으로 우리에게는 최근 강제규 감독의 <마이웨이>의 노르망디 전쟁 장면 촬영지로 널리 알려졌다. 서유럽에 비해 물가가 저렴하고 아름다운 풍광을 갖고 있어 최근 서유럽의 대체 촬영지역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한국과 북한 모두 라트비아와 1991년 수교를 맺었다. “베를린과 라트비아의 물가 차이가 어마어마하더라”라는 류승완 감독은 “강박적으로 외국 길바닥에 돈 뿌리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다”며 웃었다. 일부 헌팅팀이 두 나라의 주요 촬영지를 다녀왔고 그가 최종 확정했다. 물론 다채로운 풍광을 담을 수 있는 장점도 있었다. 아무래도 베를린은 급속한 현대화로 인해 ‘고전 첩보영화의 느낌’을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어 라트비아는 대체촬영지로 더없는 선택이었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