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가필드의 불꽃같은 삶에는 천성을 거스르지 못하는 사람의 운명이 새겨져 있다. 그는 1940년대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 가운데 한명이었고, 특히 필름 누아르의 아이콘이었는데, 경력의 절정에서 그만 요절하고 말았다. 1952년, 39살 때였다. 사인은 심장질환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런 공식적인 발표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대신 스트레스 때문에 죽었을 것이란 소문을 더 믿었다. 바로 1년 전, 존 가필드는 미국 의회의 비(非)미활동조사위원회(HUAC)에 소환돼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로 조사를 받았고, 그 뒤 1년간 할리우드에서의 활동 중지는 물론 수사기관의 끊임없는 미행까지 받았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개인의 삶이 완벽하게 파괴된 것이다.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의 아들인 존 가필드는 1930년대 뉴욕의 ‘그룹 시어터’(Group Theater) 출신이다. 여기는 러시아 출신 연극인들이 많았던 곳으로, 메소드(Method) 연기의 본산이었고, 또 진보적 예술인들의 거점이었다. 엘리아 카잔이 이곳의 동료였다. 1930년대 경제공황을 맞아 미국의 좌파가 사회적 영향력을 확장할 때, 그룹 시어터 멤버들은 대개 이런 흐름에 찬성했다. 실제로 미국 공산당에 가입한 멤버들도 있었다. 말하자면 가필드는 진보적인 연극인들과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으며 청년기를 보냈다.
그의 시대가 열린 것은 전쟁이 끝나고, 필름 누아르들이 서로 경쟁을 벌일 때 발표된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1946)부터였다. 그 영화에서 가필드는 떠돌이로 나와, 팜므파탈(라나 터너)을 만난 뒤 살인을 저지르고, 결국 사형수가 되는 누아르 남성의 전형을 연기한다. 실제로 가필드는 가족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며, 길거리에서 자랐고, 뒷골목의 10대 깡패들의 두목이었는데, 그런 어두운 과거가 부랑자의 불안한 얼굴 위에 그대로 새겨져 있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게스투스’(Gestus, 사회적인 관계가 드러나는 전형적인 태도의 연기)를 넓게 해석하면 가필드의 얼굴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의 성난 얼굴 자체가 미국의 사회적 모순을 복합적으로 표현하고 있어서다.
연이어 가필드의 ‘3대 누아르’가 발표된다. 순서대로 <육체와 영혼>(감독 로버트 로슨, 1947), <악의 힘>(감독 에이브러햄 폴론스키, 1948), <그는 온종일 뛰었다>(감독 존 베리, 1951)들이다. 세 감독 모두 과거에 미국 공산당 당원이었거나, 혹은 지지자로서 미 의회의 소환을 받은 인물들이다. 로버트 로슨은 공산당원이었고, 결국 뒷날 동료들의 이름을 댄 덕분에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다. 에이브러햄 폴론스키는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른 뒤, 차명으로 작품을 발표하곤 했지만 소환된 그날 이후 사실상 경력이 끝장나고 말았다. 가필드의 유작을 감독한 존 베리는 프랑스로 피해야 했다.
가필드가 주로 누구와 작업했는지를 보면 사실상 그의 정치적 성향을 짐작할 수 있다. 1951년 가필드도 소환됐다. 그는 동료의 이름을 대지 않았다. 의회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는 그의 태도는 전국에 알려졌고, 미운털이 박힌 그는 더이상 영화를 할 수 없었다. 그러고서 1년 뒤 죽고 말았다.
가필드는 학교에서 두번 퇴학될 정도로 제도에 적응하지 못한 문제아였다. 그런데 연극을 만났고, 여기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대사는 너무나 유명하고, 그건 아무도 따라하지 못할 언어를 통한 분노의 표현법이었다. 10대 시절 길거리에서 세상의 잔인함을 다 배웠다는 그는 자신처럼 빈민촌에서 살 수밖에 없는 하층민들의 숙명을 연기하며 누아르 시대의 스타가 됐다. 그들의 삶과 이별할 수 없는 천성이 결국 그의 발목을 잡았다. 엘리아 카잔처럼 동료를 배신하고 이름을 댔다면, 그 뒤의 부귀영화는 따놓은 당상일 텐데, 가필드는 어릴 적 빈민촌 친구들과 나눴던 우정의 순수함을 결코 배반하지 못한 것이다. 그의 장례식에 당시로선 영화계 최고인 1만명의 추도객이 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