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제45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말론 브랜도의 이름이 불렸을 때 사람들은 당황하기 시작했다. 말론 브랜도 대신 시상대에 오른 묘령의 인디언 여인이 인디언의 인권에 관한 글을 낭독하려 했기 때문이다. 연설은 이내 제지되었고 심지어 대리인으로 나선 사친 리틀패더 공주는 진짜 인디언이 아니라 배우임이 밝혀졌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미국인디언운동(AIH)의 정당성을 알리려 했던 그의 계획은 멋들어지게 성공했고 시상식은 할리우드 역사상 기념비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으니. 아마도 집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을 말론 브랜도는 사색이 된 아카데미 관계자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통쾌해하지 않았을까.
말론 브랜도는 자서전에서 “나는 권위에 도전해 성공하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꼈다”라고 밝힐 만큼 관습과 권위를 혐오했다. 그렇다고 반항을 위한 반항에 무작정 매달리는 철부지는 아니었다. 목적을 위해선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을 활용할 줄 아는 지능적인 반역자에 가깝다. 1960년대 미국의 얼굴이었던 그는 70년대에 들어서는 인디언들의 피 위에 서 있는 미국에 환멸을 느껴 미국인디언운동에 몰두한다. 많은 시간과 돈이 들어가는 일이었다. 말론 브랜도는 이를 위해 가능한 한 적은 시간 연기하고 최대한 많은 출연료를 받기로 한다. 1978년 <슈퍼맨>에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보다 많은 약 400만달러의 출연료에 러닝 개런티까지 챙기며 최고액 카메오로 악명을 떨쳤다. 메소드 연기의 신으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를 거리낌없이 활용한 셈이다. 젊은 나이에 이미 최고의 위치에 올랐고 <대부>를 통해 다시 한번 할리우드의 전설이 되었지만 스튜디오의 반대편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하는 쪽을 선택했다. <워터프론트> 시사 뒤 연기를 극찬하는 이들에게 굳이 “내 연기는 들쭉날쭉했어”라고 쏘아붙여야 직성이 풀렸던 타고난 반항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