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양각색의 풍운아들이 가득했던 1970년대 할리우드. 그 시대 할리우드의 숨겨진 사건 사고와 활약상을 꼼꼼하면서도 역동적으로 총망라하여 많은 인용과 일화를 가능케 해주는 흥미로운 책 <헐리웃 문화혁명>은 그중에서도 할 애시비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숨기지 않는다. 1970년에 감독 데뷔하여 정확히 10년간 뛰어난 영화들을 만들고 80년대에 조락한 그는, 1988년 59살의 이른 나이에 죽었는데 <헐리웃 문화혁명>은 그 두꺼운 책의 종결부를 그의 마지막을 묘사하는 데 바치고 있다. 마치 애시비의 퇴장을 말하는 것이 1970년대의 퇴장을 말하는 것인 양.
책 속에는 그에 관한 증언들이 줄을 잇고 있다. “할은 ‘엿 먹어라 씨팔놈아. 나는 이렇게 할 작정이니까. 싫으면 네 귀에 박아둬’ 하는 식이었다”, “그는 거부당하지 않기 위해 싸웠지만 자신이 언제나 거부하는 편이어야 했다”, “할은 제도를 혐오했다. 한편으로는 이를 두려워했다”, “할은 세상 물정을 잘 몰랐다”, “할은 당대의 연출가들 중에서 가장 미국적인 인물이자 가장 독특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할리우드의 희생자, 위대한 할리우드의 비극적 이야기다” 등이다. 애시비는 종속을 싫어하고 제도를 거부하고 자유를 좇는 당대의 낭만적 기질을 지녔던 모양이다. 애시비의 격식 없는 외양 때문에 배우들은 종종 정말 그가 감독인지 의심했다고 한다.
애시비는 감독이기 이전에 실력있고 유명한 편집기사로 먼저 명성을 떨쳤는데, 1967년에는 오스카 편집상까지 수상했다. 하지만 오스카 트로피를 받고서도 그는 그걸 문에 괴어놓는 쐐기로 쓰면 딱 맞겠다고 말해서 구설수에 올랐고 실제로 훗날 그의 집을 찾았던 누군가는 그의 집에서는 정말 오스카 트로피를 찾아볼 수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애시비의 기질은 실생활에서도 유별났다. 예컨대 의학이라는 제도와 의사들을 싫어했던 그는 말년에 불치의 병에 걸렸을 때에도 결국 링거를 꽂은 채로 병원을 뛰쳐나와 호텔로 피신한 뒤에 집으로 다시 돌아왔고 수술대에 오른 걸 후회했고 수술한 의사와 병원을 저주했고 수술이라는 제도적 치료행위를 권유했던 친구마저도 다시 만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배우 더스틴 호프먼은 병석에 누워 있던 당시의 그를 두고 “그는 아팠을 때조차 여전히 할이었다”고 말했다.
“나는 유타의 오그던에서 넷째로 태어났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내가 5살인가 6살 때 이혼했고, 아버지는 내가 12살 때 자살했다. 나는 21살이 되기 이전에 결혼과 이혼을 두번 했고 17살 때 히치하이킹으로 LA까지 왔으며 스튜디오에서 사무용 인쇄기 작동기사로 일하기 전까지는 50개에서 60개 정도 되는 직업을 전전했다”고 영화계 이전의 자신의 삶에 대해 축약해 말하곤 했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도 대개 그런 주변부 인물들이었다. 자살을 꿈꾸는 10대 소년과 80대 할머니의 사랑을 그린 <해롤드와 모드>(1971). 두명의 헌병이 죄지은 군인을 감옥으로 이송하다 친구가 되는 <마지막 지령>(1973), 세상을 잘 모르는 정원사 한명이 세상에 나와 미국의 상위 계층을 깨우치는 <찬스>(1979). 이 대표작들을 통해 애시비는 세련됨과 냉철함과 따뜻함이 두루 섞인 자기만의 블랙코미디 세계를 선보였다.
“어느 면에서 할이 바로 찬시 가드너였다”는 누군가의 비유는 적절해 보인다. <찬스>의 주인공 찬시 가드너는 아이같이 순진하고 자유로운 인물로 세상을 한번 뒤흔든 다음 홀연히 사라진다. “언제라도 떠날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인상이 강했던 애시비도 그렇게 떠나갔다. 다만, 한때는 너무 빨리 잊힌 불운한 재능으로 손꼽혀왔지만 지금에 보니 그의 추종자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하나인 리처드 링클레이터는 그를 두고 “궁극의 할리우드 무법자”라고 불렀고, 최근 미국에서 출간된 할 애시비 전기의 제목은 <할 애시비 되기: 할리우드 반역자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