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여름에 부르는 이름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준
2016-07-04
글 : 이주현
사진 : 백종헌

2008년 <실천문학> 등단 2012년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시집을 얘기하면서 판매부수를 먼저 들먹이는 것은 마땅치 않은 일이란 생각이 들면서도, 박준의 첫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가 25쇄를 찍고 6만부가 팔렸다는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시집은 1만부 팔리기도 힘든 게 요즘 물정이니까. “발화자로서의 내 말을 많은 분들이 들어준다는 건 좋은 일인데, 동시에 나는 과연 말을 잘 하고 있는가 하는 의심이 깊어지는 것 같다. 시가 이처럼 소비되는 게 좀 두렵고, 동시에 (나의 시가) 많이 읽힐 만큼 가치 있거나 아름다운가 의심도 하게 된다.” 박준의 대답에 담긴 조심스레 곱씹는 태도는 그의 시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이곳에서 당신의 새벽을 추모하는 방식은 두 번 다시 새벽과 마주하지 않거나 그 마주침을 어떻게 그만두어야 할까 고민하다 잠이 드는 것”(<나의 사인(死因)은 너와 같았으면 한다>)이라거나, “방으로 돌아와서는 나도 같이 텅 비어서 비어 있는 상(像)들이 누군가를 부를 때 짓던 표정들을 따라지어보기도”(<언덕이 언덕을 오르고 있을 때>) 하는 것처럼.

박준의 시는 사랑의 순간, 그리움의 시간, 슬픔의 자리로 채워져 있다. 그 시들은 ‘서정’이란 옷을 두르고 있다. “서정이라 했지만 일상인 거다. 먹고, 자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실수 하고, 사과하는 일의 반복. 여전히 뻔하게 남아 있는 것들, 변하지 않는 것들을 쓰게 되는 것같다.” “나만의 고유한 색은 무엇일까”에서 시작한 고민은 “차별성보다 보편성을 더 잘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답에 당도했다. 그 보편성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에서 그만의 고유성으로 빛난다. <호우주의보>란 시에서 그는 “미인도 나도/ 흔들리는 마음들에게/ 빌려온 것이 적지 않아 보였다”고 썼는데, 바로 이 ‘흔들리는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고 자분자분 보듬는 일이야말로 그가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사람도, 마음도 섣불리 떠나보내지 못한다. 그래서 시인에게 그리움은 일상적 감정이 된다. 시인은 그리운 이들을 시로 불러내 기억한다. 이를테면 “나에게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은/ 모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여름에 부르는 이름>)라고 쓰면서. 그리움은 곧잘 ‘미인’ (美人)을 향해 있다. 미인은 “지금 내 곁에 없는 존재”의 다른 이름이다. “말에도 유통기한이 있는 것 같다”는 시인은 시효가 빨리 다하는 말이 아니라 “아직 죽어선 안 될 말들을 살리고 싶었다”고 했다. 첫 번째 시집을 내는 과정에서 시인은 누나의 죽음도 경험했다. “시를 쓰면 가장 먼저 보여주던” 누나였다. 미인은 누나의 죽음 이전부터 끌어다 쓴 시어지만, 첫 시집의 적지 않은 미인이 누나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문재의 시 한 구절을 빌려 그는 말했다. “옛날은 가는 게 아니라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라고. 오래 슬퍼할 줄 아는 시인의 시는 그래서 긴 울림을 안긴다.

수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시인이 됐다. 등단 전에도 후에도 “칭찬은 많이 못 들어봤다”지만 사랑은 많이 받게 됐다. 지금은 2년째 출판사에서 일하며 시를 쓰고 있다. 그의 바람은 “시와 삶이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 간결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올겨울엔 두 번째 시집이 나올 것 같다고 한다. 왠지 길을 걷다 멈추고 그의 시들을 떠올리게 되는 일이 많아질 것 같다(“사람을 사랑하는 날에는/ 길을 걷다 멈출 때가 많고”<눈을 감고>).

그에 관한 시시콜콜

➊ 시에 아픈 화자가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박준은 실제로 자주 아프다. 반응하지 않아도 될 것에 너무 많이 반응하는 체질이라 면역 억제제를 한동안 복용했고, 그 결과 면역력이 현저히 약해져 “비만 맞아도 감기에 걸린다”고. ➋ 좋아하는 시인들이 때때로 바뀌는데 변치 않고 제일 좋아하는 시인은 백석이다. “너무 좋아서 그의 모든 시들을 다 안 읽고 있다. 아껴먹듯이 조금씩 꺼내 먹고 있다.” ➌ 박준은 여행을 자주 간다. 쓰기 위해 떠난다. “계절에 따라 좋아하는 곳이 다른데, 통영은 2월쯤 가면 좋다. 봄이 먼저 오기 때문에.” 겨울엔 강원도 철원, 화천, 홍천 같은 곳이 좋단다. “진짜 겨울”이 그곳에 있어서. 여름과 가을은 “그래도 제주도”란다.

박준 시인이 말하는 <환절기>

나는 통영에 가서야 뱃사람들은 바닷길을 외울 때 앞이 아니라 배가 지나온 뒤의 광경을 기억한다는 사실, 그리고 당신의 무릎이 아주 차갑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다//(…)//우리는 매번 끝을 보고서야 서로의 편을 들어주었고 끝물 과일들은 가난을 위로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입술부터 팔꿈치까지 과즙을 뚝뚝 흘리며 물복숭아를 먹는 당신, 나는 그 축농(蓄膿) 같은 장면을 넘기면서 우리가 같이 보낸 절기들을 줄줄 외워보았다

여러 경험과 머릿속에 저장해놓은 몇개의 이미지들이 섞여 완성된 시다. 물복숭아를 먹는 애인의 모습을 불러온 것은 시에서나 현실에서나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는데 통영의 바닷길 경험은 시와 현실이 좀 달랐다고. “배를 탔다. 선장님이 뒤를 보며 가시기에 왜 뒤를 보냐고 물었다. ‘바닷길은 앞이 아니라 지나온 뒤를 보며 기억한다’는 말을 내심 기대하면서. 그런데 선장님은 ‘배가 지나갈 때 생기는 물보라가 곧아야지 연비가 좋아진다’는 말을 해주셨다. (웃음)”

<이름들>

박준을 모델로 한 영화

신이수, 최아름 감독의 단편 <이름들>(2013)은 첫 번째 시집을 막 출간한 젊은 시인의 하루를 담고 있다. 영화 속 시인의 실제 모델은 박준이다. 두 감독은 박준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읽고서 이 시인의 하루를 (상상해서) 찍어보기로 한다. 물론 사전에 박준 시인을 취재하지 않았다. 영화가 처음으로 상영되는 날 박준 시인은 감독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이러저러해서 당신을 모델로 한 영화를 만들었고 상영이 되니 와서 보십시오.’“메일을 받고 처음엔 ‘이거 사기 치는 건가?’ 싶었다. (웃음) 영화는, 지금 이 세상에도 젊은 시인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시인이 등장하는 영화가 많지만 가장 현실적으로 시인의 모습을 그린 영화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