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창작과비평> 등단 2015년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등단을 꿈꾸는 문학청년 가운데 ‘안희연’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3년간 각종 문예지의 시 부문 신인상 최종심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지만 등단의 문턱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2012년 창비 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한 칠전팔기의 아이콘이다. “처음 투고한 시가 본심에 오르기 시작하면서 거의 모든 문예지 신인상에 투고했다. 늘 최종심에 오르는 걸 남들은 부러워했지만 당사자에겐 괴로운 일이었다. (웃음)” 그럼에도 시 쓰기를 멈추지 않던 그녀는 마침내 2012년 창비 신인시인상에 호명됐고, 시인으로 데뷔했다. “늘 최종심에서 내 시를 만났던 시인 선생님들이 술을 한잔 따라주시며 ‘잘 채워서 좋은 시로 첫인사를 할 수 있기를 기다렸다’고 격려해주시더라. 축복받으며 시작한 셈이다. (웃음)”안희연 시인의 글쓰기에 대한 열망은 동명의 세편의 시 <백색 공간>에서 드러난다. 그녀는 ‘단 한권의 책이 갖고 싶어/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은’ 백지를 마주하고, ‘미끄러지면서 계속해서 미끄러지면서/ 글자의 내부로 들어간다’. 그리고 이윽고 그녀는 ‘이곳이/ 완전한 침묵이라는 것을 알았다’. 침묵을 통해 역설적으로 글쓰기를 지향하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시의 세계는 귀가 없는 적막하고 고요한 공간이다. 그 이상적 상태에 가닿기 위해 노력한다.” 백색 공간을 향해 다가서는 그녀의 시적 주체는 무기력한 익명성에 기대어 있지만, 끊임없이 ‘하루해가 저물 때까지 한 사람을 완성하는 일’(<입체안경>)에 매진하며 ‘단 한 순간이라도 나의 최대치가 되어’ (<러시안 룰렛>)본다. “나는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항상 의심한다. 내 안에 많은 내가 있는데, 그것들의 총합이 과연 나일까. 나는 미완성의, 무수한 나를 전유하면서 살아 있는 상태다.”
그녀의 시에서 주목해야 할 지점은 주체의 옆이다. 그녀는 ‘가시권 밖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일초에 하나씩/ 새로운 옆’ (<백색 공간>)을 만들며 수많은 옆들로 ‘나’를 구성한다. “‘옆’은 ‘너의 슬픔이 끼어들’ 수 있는 나의 윤리적 가능성의 지평”이라는 김수이 문학평론가의 표현이 적절하다. 안희연 시인은 “등단 초기에는 나 자신의 불안에 대해 썼지만, 시집 3, 4부에 실린 시들은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시”라고 말한다. “나만 보느라 못 보고 지나친 것, 내가 옆에 놓아야 할 것들을 발견했다.” 그녀에게 있어 옆이란 “선후 관계나 앞과 뒤에 놓이는 게 아니라 나란해지는 것, 곁을 내어주는 것”이다. 그녀는 세월호 참사를 다룬 <검은 낮을 지나 흰 밤에> <슬리핑 백> 등의 시를 시집에 실었다. “당면한 고통을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시가 뭔가를 바꿀 수 있지는 않더라도, 통각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나.” 그녀에게 시는 “잊고 있었거나 잃어버린 걸 건드려 부재를 실감케 하는 것, 압정 같은 존재”다. 그녀는 <기차는 총, 노래는 총알>에서 “내정된 실패의 세계 속에 우리는 있다”고 단언하면서도 ‘우리에겐 노래할 입이 있고/ 문을 그릴 수 있는 손이 있다’는 희망을 그려내고, ‘절벽이라고 한다면 갇혀있다/ 언덕이라고 했기에 흐르는 것’이라며 언령의 힘을 역설한다. “시와 삶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시인의 믿음은 시를 쓰게 하는 원동력이다.
지난해에 첫 시집을 출판한 그녀는 시집을 낸 후 “모범생처럼 시에 너무 많은 의미를 눌러 담아 쓰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를 하기도 했다. 두 번째 시집은 그녀의 고유한 발성을 보다 잘 드러내는 시집이 될 것이다. “이제 조금 자유로워졌다. 내 안의 모난 부분을 더 모나게 만들어, 톱니처럼 삐죽삐죽하고 즉흥적인 시를 쓰려 한다.” <백색 공간>의 한 구절처럼, 안희연 시인은 ‘그리다 만 얼굴이 더 많은 표정을 지녔음을 알게’ 되는 과정에 있다.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부치는' 304 낭독회
“세월호 사태로 희생된 304명의 이름을 한명 한명 불러주자는 취지로 기획된 304 낭독회에서 일하고 있다. 시인, 소설가, 평론가들이 주축이 됐지만 애도의 뜻을 지닌 시민들도 자유롭게 참여해 나누고 싶은 글을 낭독한다. 매달 마지막주 토요일에 해서 이제 막 22번째 낭독회가 끝났는데, 이 낭독회를 다 하려면 25년은 걸리겠더라. 그 25년 동안 낭독할 의지가 있다.”
안희연 시인이 말하는 <연루>
당신에게는 사슴 한 마리가 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사슴은 오래전 당신을 찾아왔고 당신 곁에서 죽을 것이다//(…)// 오늘도 사슴은 홀로 잡목 숲을 떠돌고 있었다 숲에는 하염없이 비가 내렸고/ 이윽고 사슴은 덫에 걸리고 말았다 먼 곳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쇠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린다/ 그곳에 무언가 있다는 듯이/ 처음이 아니라는 듯이//(…)// 당신이 잠에서 깨어날 때 사슴은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당신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아침 햇빛을 보면 자주 무릎이 꺾인다 자꾸만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이 든다
“<현대시> 5월호에 발표한 시다. 원래 꿈을 잘 안 꾸는데, 어느 날 꿈에서 울고 있는 사슴을 봤다. 그 이미지가 너무나 명징해 그 사슴이 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 서로의 존재는 인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실은 연결된 존재들인 것처럼 느껴졌다. 세상 모든 것들은 먼 곳에 있는 어떤 것들과 연결돼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상상으로 써본 시다.”
시인의 영화와 시, 그리고 여행
안희연 시인은 잡지 <대학내일>에서 문화 파트의 학생 리포터로 활동하며 영화 리뷰를 쓰고 영화제 취재를 다니던 기자 출신의 시인이다. 영화와 시를 사랑하는 그녀는 지난 10년간 <비포 선라이즈>(1995)의 배경인 오스트리아 빈을 비롯한 영화 촬영지, 폴 발레리, 샤를 보들레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를 비롯한 작가의 고향 등 문화예술적 의미를 지닌 곳을 찾아다녔다. 그녀는 그간의 여행기를 직접 찍은 사진과 함께 담아낸 에세이집을 올가을 펴낸다. 제목은 아직 미정. 사진 속 장소는 짐 자무시 감독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2013)의 촬영지인 모로코 탕헤르 근처의 아실라라는 작은 마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