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스페셜] 오늘 아침 단어 -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유희경
2016-07-04
글 : 이예지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등단 2009년 시집 <오늘 아침 단어> 2013년 시집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

“자꾸 자리를 비워 미안하다. 계속 손님들이 오셔서, 하하.” 인터뷰하랴, 시집들을 계산하랴, 시인은 분주했다. 시집 서점 ‘위트 앤 시니컬’을 오픈한 유희경 시인은 광주, 대구 등 멀리서 찾아온 이들을 따듯이 맞이하며 카운터를 지켰다. 은사인 김소연 시인이 “이 공간에 온 누구도 소외받지 않는 느낌을 주라”고 했던 말을 실천하는 중이다. 독자와 시인과 시가 다정히 내통하는 공동체, 위트 앤 시니컬의 주인 유희경 시인은 문학과지성사와 위즈덤하우스에서 10년간 편집자로 일해오던 중 왼쪽 눈에 이상이 생겨 더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되자, 시와 관련된 기획을 구상하다 시집 서점을 오픈했다.

시집 서점 주인이기 앞서, “살아온 시간 대부분을 시 쓰기에 골몰해온” 유희경 시인은 200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그의 시는 권혁웅 시인의 <시론>에 따르면, ‘불행한 서정시’에 가깝다. ‘나는 기침을 뱉으며 언 손으로 쥔 계이름을 생각한다 비스듬한 지금, 나는 이 모든 것이 노래 같다 바깥은 여전히 청춘의 겨울이 쏟아낸 삼킨 것들… 문득, 눈이 쌓인 다음 날에 내가 아프다.’(<폭설>) 그의 세계에 단 하나의 시제가 있다면 깊은 겨울밤이리라. 첫 시집 <오늘 아침 단어>(2011)에 실린 시편들은 겨울 코트에 묻어나는 찬바람처럼 서정적이며 쓸쓸하고 불우하다. 시인은 기형도를 연상케 하는 그의 먹먹한 슬픔이 “세상을 비애스럽고 불행하게 바라보는 관점”에서 태어난 것이라고 말한다. “요즘 같은 시대에 어떤 희망이 있겠나. 반항보다는 한없이 비애에 젖어 슬퍼하는 태도지만 적어도 비겁해지지는 않으려 노력한다.” 그렇기에 그는 시를 쓴다. “나약한 존재로서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알고 있는 것을 발화하고자 한다. 가장 파급력이 적은 장르인 시라 할지라도.” 그의 시가 불러일으키는 은은한 파장은 일상적 사물들로부터 시작된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간 밤 당신 꿈을 꾼 덕분에/ 가슴 바깥으로 비죽이 간판이 하나 걸린다’(<티셔츠를 목에 넣을 때 생각한다>), ‘지갑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야, 나는 코트 속 아버지를 발견한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싸워야 하는군요 같은 코트 속에서도’(<코트 속 아버지>). “티셔츠나 코트 같은 물건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낯선 단어로 생경함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시의 한 방식이라면, 일상적 단어에 의외성을 부여해 바라보게 하는 것은 내 시의 방식이다.” 일상을 잇는 정서적 공명으로 시작해, 유희경 시인의 마침표 없는 언어는 물 흐르듯 유려하고 자연스레 스며든다.

시인이 물기어린 언어들로 키워낸 나무 같은 두 번째 시집 <당신의 자리-나무로 자라는 방법>은 대림미술관 프로젝트 스페이스인 구슬모아 당구장에서 전시의 형식으로 선보였다. “살아온 나이테들을 시로 풀어 서른네편의 시를 전시했고, 그 시들을 모은 시집을 관객에게 선물했다.” 희귀본이 되어버린 두 번째 시집을 그는 곧 작은 출판사에서 복간한다. 세 번째 시집은 내년 1월에 출간할 예정이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 조금 달라졌다. 생의 비밀에도 로직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주체에서 벗어난 객관적인 태도로 시에 접근했다. 구조적이고 비밀스러운 시들이 될 거다.” 그에게 시 쓰기란 “은밀한 보편화”의 작업이다. “시라는 장르에서는 생산자와 수용자간의 교감이 은밀히 진행된다. 영화가 극장에서 함께 웃고 울며 익명의 군중성을 갖게 된다면, 시는 철저히 개인 대 개인으로 교감을 나눈다.” 그는 시가 단순한 교감에 그치지 않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전달한다”고 말한다. “‘그랬대’가 아니라 ‘그래서 이럴 거야’라는 것”, 유희경 시인에게 시는 예언자 테레시아스의 말처럼 은밀한 예언인 셈이다.

시와 연극과 영화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극작을 전공한 유희경 시인은 희곡창작집단 ‘독’에 소속되어 있으며, <별을 가두다> <당신이 잃어버린 것> 등 희곡을 쓰는 극작가이기도 하다. 비극적 방식의 시 쓰기와 달리, 희곡을 쓸 땐 늘 코미디다. “가장 좋은 비극은 희극”이기에 결국엔 같은 태도라는 게 시인의 말이다. 극작가인 그는 영화의 시나리오까지는 굳이 욕심내지는 않는다. 자본의 시스템 속에서 창작가의 의도가 존중 받지 못할 수 있는 상황이 염려되기 때문. 하지만 영화를 보는 즐거움을 놓칠 순 없다. “최근엔 파올로 소렌티노 감독의 <그레이트 뷰티>(2014),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자객 섭은낭>(2015)을 인상 깊게 봤다. 전자는 회한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작품이었고, 후자는 바람이 불면 날아가버리는 아름다움이 있더라. 미장센으로 포착하고 싶어 하지도 않고, 방점을 찍거나 의미를 가두지도 않고 삶을 하나의 인상처럼 그려냈다.”

유희경이 말하는 <겨울의 언덕>

아름답지도 잊히지도 않는/ 가늘고 긴 바람이 있어/ 얼굴은 성냥처럼 붉어지고/ 쌓인 가지에선 그늘 부러지는 소리/ 얼어붙은 새벽은 어둡고 조용했네/ 기억은 왜 자꾸 기억을 낳는지/ 미끄러지듯 가팔라져가는/ 마른 눈 맞으며 그때, 나는/ 무엇을 찾으러 가는 중이었을까

“청년기의 언덕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20대엔 구산동 언덕에 살았는데, 밤에 집으로 돌아갈 때면 하루를 끝냈다는 것에 대해 안도감이 들더라. 사회인에게 오늘의 끝은 내일의 연장이지만, 청년 시절엔 하루하루가 다르다. 이십대는 무언가를 찾아 헤맬 시기니까. 오늘의 걱정은 오늘의 몫으로 끝나서 내일 일을 생각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언덕을 오르는 기억을 김종삼 시인식으로 써낸 시다.”

위트 앤 시니컬

위트 앤 시니컬은 파스텔뮤직이 운영하는 신촌의 카페 파스텔 한켠에 숍인숍으로 자리한 시집 서점이다. 그가 ‘위트 있는 시’라고 한 말을 하재연 시인이 ‘위트 앤 시니컬’로 잘못 알아들은 것을 계기로, 모든 시는 재치와 냉소를 지닌다는 점에서 이름을 지었다. 오픈 20여일 만에 1200권을 판매한 이 서점의 베스트셀러는 1위 최승자 시인의 <빈 배처럼 텅 비어>(문학과지성사), 2위는 김혜순 시인의 <죽음의 자서전>(문학실험실), 3위는 유진목 시인의 <연애의 책>(삼인). 소규모 출판사에서 나온 책들의 약진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이 서점의 가장 큰 매력은 매일 바뀌는 디스플레이, ‘오,늘’ 서가다. 기준은 그날그날 시인의 마음대로. 선배시인들에게 영향을 받은 시인들의 계보를 쭉 디스플레이하기도 하고, ‘깔맞춤’해 비치하기도 한다. 문인들의 추천 시집과 그 코멘트를 볼 수 있는 소소한 재미다. 시 낭독회, 음악감상회 등 다양한 행사도 진행하니 위트 앤 시니컬 트위터(@witncynical)를 참고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