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한 무명감독.” 지난 2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김성욱 평론가는 미국 영화감독 리처드 플라이셔에 대해 이렇게 소개했다. <해저 2만리>(1954)나 <바디 캡슐>(1966, 국내에는 <마이크로 결사대>라는 제목으로 더 유명한 작품이다)과 같은, 누구나 제목을 들으면 무릎을 칠 만큼 잘 알려진 영화들을 연출했지만 정작 영화감독으로서 그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관객은 많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2006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47편의 장편영화를 연출한 리처드 플라이셔의 스펙트럼은 무척이나 다채롭다. 누아르, 전쟁, 뮤지컬, 코미디, SF, 호러, 판타지, 다큐멘터리, 전기영화…. 플라이셔는 거의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영화감독이었고, 연출작의 규모 역시 다채로웠다. 그런 그의 삶을 <가디언>의 부고기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한편의 걸작(그 작품이 무엇인지 <가디언>은 독자의 상상에 맡겼다), 몇편의 작은 보석 같은 영화와 또 다른 몇편의 재능 있는 상업영화, 그리고 몇편의 범작을 만든 재능 있는 감독.” 어쩌면 리처드 플라이셔의 인생은 거대한 야심으로 충만한 소수의 영화감독들을 제외한, 보통의 연출자들이 꿈꾸는 해피엔딩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리처드 플라이셔는 엔터테이너의 유전자가 다분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인기 만화 캐릭터 베티 붑의 창조자이자 뽀빠이, 슈퍼맨 애니메이션의 제작자로 잘 알려진 플라이셔 스튜디오의 수장 맥스 플라이셔였다. 미국 애니메이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아버지를 둔 소년이 영화감독을 꿈꾸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겠다 짐작할 수 있지만 유년 시절 리처드 플라이셔의 꿈은 감독이 아니라 정신과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가 미국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브라운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뒤의 일이다. 예일 드라마 스쿨에 입학해 극작업을 하던 그는 1942년 RKO 픽처스에 입사해 B급 누아르영화의 연출자로 출발,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열차를 배경으로 갱스터의 미망인을 암살하려는 마피아와 경찰의 숨막히는 추격전을 다룬 필름누아르영화 <익스프레스>(1952)는 RKO 픽처스의 수장 하워드 휴스와 더불어 메이저 스튜디오 관계자들에게 리처드 플라이셔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이후 플라이셔는 당대의 스타 커크 더글러스가 주연을 맡은 블록버스터 <해저 2만리>와 <바이킹>(1958), 로버트 미첨이 출연한 서부극 <밴디도>(1956) 등을 연출하며 할리우드 상업영화 감독으로 승승장구했다.
감독으로서 리처드 플라이셔의 위대한 점은 결코 같은 자리에 머무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1960년대, 그는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적인 커리어를 뒤로하고 유럽으로 떠났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길>(1954)과 <카비리아의 밤>(1957)을 제작한 이탈리아 프로듀서 디노 데 라우렌티스와의 협업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줬다. 물론 모든 시도가 성공적이었던 건 아니다. 라우렌티스와 함께 앤서니 퀸이 주연을 맡은 종교영화 <바라바>(1962)를 만든 뒤 플라이셔는 라우렌티스와 <래니버드> <돈 카밀로> 등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지만 번번이 무산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프로덕션을 경험한 플라이셔의 영화세계는 한층 다채롭게 변모했다. 할리우드로 복귀한 그는 SF영화 <바디 캡슐>과 뮤지컬 <닥터 두리틀>(1967), 체 게바라의 전기영화 <체!>(1969)와 전쟁영화 <도라 도라 도라>(1970)를 쏟아냈다. 한명의 창작자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다종다양한 개성의 영화를 이 시기의 리처드 플라이셔는 1년에 한편씩 연출했던 것이다.
르네상스형 감독이었던 리처드 플라이셔의 재능이 특히 빛나던 장르가 있다. <강박충동>(1959)과 <보스턴 교살자>, <10번가의 살인>(1971)으로 대변되는, 실화를 기반으로 한 밀도 높은 범죄영화다. 이 세편의 영화에서 플라이셔는 다큐멘터리스트의 냉철한 시선으로 한 사회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은 잔혹한 살인사건의 전말을 파헤쳐나간다. 그의 범죄영화에서 범인의 정체나 범행동기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플라이셔는 그보다도 이성의 영역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악의 실체에 대한 공포와 이를 둘러싼 사회의 히스테리컬한 대응 방식,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는 두려움의 정서를 재현하는 데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그의 대표적인 범죄영화로 평가받는 <보스턴 교살자>에서도, 토니 커티스가 연기하는 연쇄살인범 드 살보는 상영시간이 절반가량 지났을 무렵에서야 등장한다. 보스턴 사회를 패닉에 빠뜨렸던 연쇄살인범의 정체가 경찰의 용의선상에서 저만치 비켜나 있던, 의외의 인물이라는 점은 보는 이의 간담을 더욱 서늘하게 만든다. <보스턴 교살자>의 열렬한 지지자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이 영화로부터 영향을 받아 <큐어>(1997)를 연출했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동기가 분명치 않은 살인사건, 실체에 근접할수록 점점 더 혼란에 빠지는 <큐어>의 등장인물들은 플라이셔가 포착했던 미지의 두려움으로부터 파생된 존재들이다. 그렇게 리처드 플라이셔는 후대의 감독들에게 위대한 모험가이자 뛰어난 관찰자로 기억되고 있다.
어떤 감독?
<보스턴 교살자>(1968) 리처드 플라이셔 감독
누가 언급했나.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2017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영화제’에서 자신의 영화 <큐어>에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보스턴 교살자>를 언급했다. 그와 대담자로 함께 나선 봉준호 감독 역시 범죄영화 <살인의 추억>의 연출자로서 이 영화에 놀라움을 표했다.
<보스턴 교살자>는 어떤 영화?
1962년 미국 보스턴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제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 보스턴에서 여성들이 누군가에게 목이 졸려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유사한 범행 수법이 계속되자 경찰은 이를 연쇄살인사건이라 규정하고 수사망을 좁혀나간다. 하지만 유력한 용의자나 실마리가 나타나지 않으며 사회는 혼란과 공포에 빠진다. 영화의 전반부, 리처드 플라이셔는 1960년대 당시 유행하던 화면 분할 기법을 대담하게 사용해 살인사건을 재구성하며 스릴러 장르로서의 긴장감을 높인다. 범인의 정체가 공개되는 후반부는 ‘보스턴 교살자’ 드 살보를 연기하는 토니 커티스의 독무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방에 거울이 달린 하얀 방에서, 드 살보가 살인범으로서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순간을 롱테이크로 보여주는 엔딩 신은 범죄영화의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