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더디게 흐르는 것이 서점일 것 같지만, 의외로 가장 빠르게 새해에 대비하는 것이 서점가다. 11월부터 2019년의 트렌드를 예측하는 책들이 출간되고, 12월 중순이면 경쾌한 표정을 한 1월 잡지가 서가에 누워 있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게 좋다>의 김영민 교수는 새해라고 해서 ‘행복의 계획’을 하지 않는다고 썼다. 날짜, 시간이라는 것이 인간이 정해놓은 약속에 불과하며 새로운 계획은 언제나 실망을 동반할 뿐이지 않느냐고 말이다. 죽고 싶을 만큼 우울해도 먹고 싶은 건 생각난다는 제목의 서적이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에 자리했던 2018년을 정리하며, 12월의 <씨네21> 북엔즈 서가에는 담담하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책들을 모았다. 문학과지성사에서 재발간된 한강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앨리슨 먼로의 단편소설집 <착한 여자의 사랑>, 영화감독, 촬영감독, 에디터, 프로듀서와 프로덕션 디자인, 의상 디자이너와 시나리오작가 등 일곱 분야의 영화 직업인 인터뷰를 모은 <필름크래프트> 세트, 앞서 언급했던 김영민 교수의 에세이집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 오쓰이치 외 일본 작가들의 단편집 <메리 수를 죽이고>이다. 1995년에 출간된 소설집부터 2014년 나온 소설집까지 작가의 궤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한강 소설집은 눈송이가 내리는 깊은 겨울밤에 읽기 좋은 소설이다. 앨리슨 먼로의 단편소설 <착한 여자의 사랑>에 실린 소설들은 1950~60년대 캐나다가 배경이다. 표제작에서 알 수 있듯이 소설들의 주인공은 평범한 여자들이다. 일상에서 갑자기 일어나는 사건, 평범한 선택으로 삶이 큰 방향으로 휘어지지만 우리의 주인공들은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삶은 언제나처럼 악의 만면한 미소를 지으며 휘말리는 인물들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다. 정세랑 작가의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의 주인공들 역시 여자들이다. 한국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여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는 작가의 다정한 문장이 돋보인다. <필름크래프트> 시리즈 중 <영화감독>편은 감독을 꿈꾸는 미래의 영화인이 아니더라도 직업인의 태도에 대해 배울 게 많은 책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최선의 노력으로 완성해나가는 사람들의 겸허한 글은 언제나 존경스럽다. 일본의 여러 작가의 단편을 모은 <메리 수를 죽이고>에는 미스터리와 판타지가 섞인 개성 있는 작품들이 실려 있다. 단편집과 시리즈, 작가의 궤적들을 짚어볼 수 있는 책들과 수년간 신문지상에 연재한 칼럼을 모은 에세이집 등 주로 ‘정리’의 의미가 있는 책들이다. 잘 다듬어진 생각과 문장들이 담긴 책과 함께 올해 남은 시간도 잘 마무리하길.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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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기분 :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 <필름크래프트> 세트,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옥상에서 만나요>, <메리 수를 죽이고>, <착한 여자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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