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2019년 한국영화㉔] <소공녀>(가제) 허인무 감독 - 잊혀져가는 것을 붙잡고 싶은 안타까움을 담는다
2019-01-16
글 : 임수연
사진 : 최성열

“나이가 들수록 영화가 무서워졌다. 내가 잘하고 자신 있는 작품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소공녀>(가제)는 나에게 잘 붙는 이야기였다.” <신부수업>(2004), <허브>(2007) 등을 연출한 허인무 감독은 한동안 한국영화계를 떠나 중국에서 혹은 드라마계에서 활동했다. “도회적인 젊은 여성이 나오는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2011)는 시골 사람인 나에게 좀 낯설었는데, 솔직히 미진한 결과를 낳았다”고 고백한 그는 “점점 남성 위주의 영화가 즐비한 상황에서 나한텐 그런 영화가 별로 재미가 없더라”는 점도 영향을 줬다고 전했다. 태어나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나에게는 소스가 있다”고 생각해 시작했다는 <소공녀>(가제)는 갓 태어난 동생 진주를 업고 갑자기 나타난 손녀 공주와 할머니 말순 사이에 싹트는 가족애를 다룬 휴먼 드라마다. 일견 소박한 기획처럼 보이지만 세대를 대표하는 ‘연기 귀신’ 나문희와 김수안이 선택한 작품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한동안 <천국의 눈물> <천상의 약속> <내 남자의 비밀> 등 드라마 대본 작업을 했다.

=영화감독이 드라마 대본을 쓰는 데에 우려의 시선이 있었다. 영화는 디테일로 간다면 드라마의 경우 한회 안에도 엄청난 풍파가 존재한다. 조연 하나하나를 다 챙겨줄 수 있다는 또 다른 매력도 있는데, 구성 잡을 때 인물을 확장하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그를 바탕으로 <소공녀>(가제) 시나리오를 쓸 때 모든 조연 캐릭터를 소모품이 아닌 하나의 인물로 만들어주려고 했다. 앞으로 영화 하면서도 좋은 아이템이 있다면 드라마 작가 일 역시 계속하고 싶다.

-<아이 캔 스피크>(2017)로 여우주연상을 휩쓸던 당시 나문희 배우가 선택한 차기작이다.

=나문희 선생님은 ‘할머니’ 역을 한다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분 같다. 실제로 수안이 또래의 손녀들이 있고 여전히 노모와 함께 사셔서일까, 이런 가족영화가 되게 의미 있다고 생각하시더라. 현장에서 선생님의 힘을 느낀 순간이 많았다. 가령 아무리 줄여도 줄여지지 않는 신이 있었는데, 촬영에 들어간 선생님의 첫 표정을 보자마자 구구절절한 설명이 모두 필요 없어졌다. 그렇게 시나리오의 1/5도 안 되게 줄어든 장면이 있다.

-이어서 김수안, 천우희의 캐스팅이 성사됐다.

=남자배우 이상으로 좋은 여자배우들이 많은데, 그들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시나리오가 적을 뿐이다. 믿고 가는 배우가 붙으면 다른 작품에서 주연을 맡을 수 있는 배우도 제2의 역할로 들어오고 엄청난 조합이 될 때가 있다. 그런 것처럼 여자들끼리 한번 뭉쳐보자는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나의 짐작이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현장에서 그런 자부심도 있었다. 여자들만 나오는 영화도 만들어져야 하고, 뭔가 끌어낼 수 있다는.

-2000년을 배경으로 삼은 이유가 있나.

=<소공녀>(가제)는 잊혀져가는 것을 붙잡고 싶은 안타까움을 담은 영화다. 그래서 지금 시점보다 시간차를 둘 필요가 있었다. 영화를 찍은 달동네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벽화가 유명해지면 동네가 갑자기 발전하기도 하는데, 촬영하면서 이 동네가 계속 남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부산 같은 대도시에 있는 학교에서 촬영했는데도 학생 수가 줄어서 곧 폐교된다더라. 외부는 비슷해 보여도 안으로 들어갈수록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와는 굉장히 다른 세계였다.

-부산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이 나오는, 부산에서 찍은 영화다.

=TV나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사투리가 많이 사라졌는데, 잊혀지는 무언가를 다루는 우리 영화와 사투리 설정이 잘 어울렸다. 또한 휴먼 드라마 장르에서는 아무래도 카메라가 인물 중심으로 가게 되는데, 부산을 배경으로 삼으면 산동네며 언덕이며 바다며 비주얼 면에서 얻는 게 많았다. 촬영은 감천문화마을에서 산복도로로 이어지는 마을 중에 찾아낸 부산시 남부민동에서 했다.

-너무 순한 이야기라서 자극적인 것에 길들여진 요즘 관객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어떡하나 하는 우려는 없나.

=휴먼 드라마 장르가 엄청난 구성, 비주얼을 갖고 접근하지는 않지만 <소공녀>(가제)를 만들 때의 진심이 관객에게도 통하기를 바란다. 휴먼 드라마 장르가 잘 안 될 때도 그런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관객이 있었고, <워낭소리>(2008)나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2014)가 잘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본다. 영화가 너무 한 군데만 쏠리면 관객의 피로도가 커지지 않나. 가끔은 이런 휴먼 드라마도 나와서 영역이 넓어졌으면 한다.

-<소공녀>(가제)를 본 관객이 어떤 걸 얻어갔으면 좋겠나.

=정말 똑똑하고 잘하는 사람들이 많은 요즘이지만 너무 뾰족뾰족한 영화만 있는 것 같다. 관객이 1%라도 힐링이 돼서 개운한 마음으로 극장 문을 나선다면 할 일을 한 감독이라는 생각이 들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집에 전화라도 한번 한다면 의미 있는 작업을 했다 싶을 거다. 나에게도 <소공녀>(가제)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기획되지 않고 영화를 포기해야 하나 했던 순간 만난 작품이라 의미가 깊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나 역시 위로를 받았다. 그런 정서를 관객도 가져갈 수 있으면 좋겠다.

<소공녀>(가제)

감독 허인무 / 출연 나문희, 김수안, 천우희 / 제작 지오필름 / 배급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 개봉 2019년

● 시놉시스_ 2000년 부산의 어느 달동네, 할매 말순(나문희) 앞에 갓 태어난 동생 진주를 업은 손녀 공주(김수안)가 나타난다. 가수를 하겠다며 집을 나간 말순의 딸 효선의 유골함을 들고, 같이 살아야 한다며. 박 선생(천우희)이 담임을 맡은 반에 전학 간 공주가 특유의 당돌한 성격으로 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사이, 말순은 갑자기 예방접종 신경 쓰랴, 기저귀 마련하랴 정신이 없다.

● 세대를 아우르는 배우들의 명연기_ “샘 같더라. 땅을 팠는데 물이 나오면 쉽게 물이 고이는 것처럼, 나문희 선생님이 물꼬를 터주셨다.” 허인무 감독은 “휴먼 드라마를 선호하지 않는 관객도 110분을 즐길 수 있을 만큼 세대를 대표하는 배우들의 명연기를 볼 수 있다”고 자신했다. 나문희가 “나가서 다 해결해주는 무림의 고수”라서 오히려 많은 디테일을 제시하는 게 불필요했다면, 성인 배우와 일하는 것 같았던 김수안은 “하나를 던져주면 탁 물어서 그걸 더 다양하게 표현하는” 등 연기 스타일도 달라서 영화가 더 풍성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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