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찍고 영화 인생 끝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래도 하는 거다.” <내부자들>(2015)과 <마약왕>(2018)에 이어 우민호 감독이 더 큰 현대사의 ‘고발’에 손을 댔다. <남산의 부장들>은 박정희 정권 18년간 ‘마피아와 다를 바 없는’ 행각으로 한국 중앙정보부(KCIA)가 벌인 정치공작과 그로 인한 비화와 비사를 기술한 김충식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첩보물. 최고 권력자 박통(이성민)을 저격한 김규평(이병헌)과 박용각(곽도원)을 중심으로 1970년대 공포정치의 실체가 무엇인지 면밀하게 탐구한다. “현시대의 문제점, 그 뿌리는 1970년대 부모님 세대에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지난해 10월 크랭크인해 촬영 중반에 접어든 지금, 우민호 감독은 “고발 시리즈는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임하고 있다. “<마약왕>을 신나게 찍었다면, 이번엔 하루하루 버티고 의심하면서 찍고 있다.” 살얼음판 같은 현장의 한가운데 있는 우민호 감독을 만났다.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1970년대 공포정치에 다가간다.
=원작 <남산의 부장들>을 처음 본 건 내가 대학생 때였다. 김충식 작가가 90년대 노태우 정권 때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취재기를 단행본으로 출간한 거다. 52만부가 팔린 베스트셀러로, 한국 근현대 정치사의 텍스트를 대표하는 책이다. 일본 저널리스트들 사이에서는 특히 한국 오기 전에 꼭 읽어야 할 책으로 인식하고 있다더라. 역사적인 사건이자 영화적인 사건이라 만들고 싶었는데 감히 엄두를 내지는 못했다. 그러다 <내부자들>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이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이유와 이야기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중앙정보부는 1970년대 유신 독재정권의 중심에 있던 기관이다. 그 권력 때문에 결국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된다. 10월 26일을 향해.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 40일의 행적을 그린다. 그 40일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파국을 맞았는지를. 인물 중심이라기보다 사건 중심의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마약왕>이 사건 없이 인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면 이건 오히려 <내부자들>에 가깝다. <마약왕>이 10여년에 걸친 세월을 그린다면 이번엔 물리적인 시간이 짧아졌다. 그래서 계속 내달리는 시간이고, 긴박감을 어떻게 살릴지가 관건이다.
-같은 시기, 권력자 암살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임상수 감독의 <그때 그사람들>(2005)도 연상된다.
=<그때 그사람들>은 사건에 방점을 찍지 않는다. 김재규가 왜 박정희를 쏘았는지, 둘 사이의 감정이 중심이 된다기보다 어수선한 시국, 한심스러운 남자들의 이야기를 희화화하는 블랙코미디적 시선이 강하다. 이 영화는 왜 그런 사건이 벌어졌는지에 집중하는 만큼 조금 톤이 다를 것 같다. 권력의 속성이 무엇이고, 이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게 됐는지 그 부분에 좀더 집중하고 있다.
-공포정치의 산실에서 기생하고 버림받았던 메인 캐릭터, ‘남산의 부장들’은 어떤 존재로 해석했나.
=박정희는 최측근이던 중앙정보부도 믿지 않았다. 부장들이 곧 2인자이고, 2인자의 이야기지만 그 2인자들도 결국 다 제거된다. 권력의 중심에 있지만 결국 권력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 더불어 박정희 자체도 장장 18년간 권력을 탐하고 지키려 하고 누린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내려올 때를 놓쳐서 권력이 시키는 대로 비참한 말로를 맞게 된다. 권력은 그 자리에 있고, 그 자리를 탐하는 또 다른 세력이 나타난다. 우리 생각에는 막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그냥 빈터 같은 느낌이 아닐까. 결국 권력의 하인이고 권력이 움직인 거다.
-김규평 부장은 권력의 최고봉에 있는 박통의 최측근에서 그를 제거하기까지 권력의 곁에서 그 속성을 보는 인물의 복잡다단성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캐릭터다. <내부자들>에 이어 또 한번 이병헌과 작업한다.
=대사가 짧은데도 사건의 복선과 복잡한 심리를 드러내는 역할이자 작은 것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디테일하게 표현해야 하는 인물이다. 이병헌이 안 하면 누가 하나 싶은 마음이었고 그래서 다른 배우에게는 시나리오를 준 적 없다. <내부자들> 끝나고 원작 판권을 샀고 같이 하면 좋겠다고 전했다. 그때만 해도 박근혜 정권이었고, 이런 시나리오에 누가 선뜻 하겠다고 할까 싶은 소재인데 다행히 승낙을 해줬다.
-극화된 영화지만 실존 인물과의 연관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캐릭터는 아니지만 일정 부분은 염두에 두고 외형을 만든 지점이 있다. 이병헌도 김재규와 비슷하게 포착한 지점이 있고, 차지철이 연상되는 곽 실장 역의 이희준 배우는 체중을 많이 증량했다. 전두환이 연상되는 배우는 머리를 밀었는데, 그 부분도 외형상 흥미로운 시도다. ‘박통’만 연상되는 이름이고 나머지는 모두 실제 인물의 이름을 쓰지 않았다.
-이성민, 이희준, 김소진 등 <마약왕>의 배우들이 전작에 이어 대거 출연한다.
=이성민 배우는 <마약왕>에서는 짧게 나오지만, 이번엔 박통 역할로 영화에서 상당한 존재감을 보여줄 예정이다. 겨우겨우 성민 선배를 꼬셔서(웃음) 캐스팅했다. 이희준, 김소진 등 배우들도 <마약왕>에서 선보인 배우들이 이번엔 더 많은 각각의 역할로 출연한다. 김 부장, 박통, 곽 실장, 박 실장, 데보라 심 등 메인 캐릭터들이 끝까지 대립하고 갈등하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배우들의 연기로 보여주려 한다.
<남산의 부장들>
감독 우민호 / 출연 이병헌, 이성민, 곽도원, 이희준, 김소진 / 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 젬스톤픽쳐스 / 배급 쇼박스 / 개봉 2019년
● 시놉시스_ 1970년대 미국 워싱턴. ‘코리아 게이트’라는 타이틀 아래 한국 로비스트와 그들의 로비 대상으로 의심되는 미의원들에 관한 청문회가 진행 중이다. 대한민국은 당시 국회, 정당, 헌법, 군, 경찰보다 우위에 있는 기관인 중앙정보부, 그리고 그 중앙정보부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자 ‘박통’(이성민)의 지배하에 있었다. 개헌에 반대하면 곧 권력에 정면 대응하는 것으로 치부해 제거하는 공포정치의 한가운데, 권력의 비밀을 알고 있는 전 중앙정보부장 박용각(곽도원)은 죽음의 위협을 견디다 못해 미국 망명을 택했다. 절대권력 유지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중앙정보부 김규평 부장(이병헌), 촉망받는 권력 2인자 곽상천 경호실장(이희준), 그리고 대한민국과 미국을 오가는 로비스트 데보라 심(김소진) 등 절대권력을 둘러싼 2인자들의 숨 막히는 정치 공작이 펼쳐진다.
● <마약왕>에 이은 또 다른 1970년대_ <마약왕>이 1972년과 그 이후 10여년의 현대사를 조명한다면, 이번엔 1970년대 후반이 그려진다. 어떻게 차별화할까. 우민호 감독은 “같은 70년대라고 해도 <마약왕>과는 톤이 많이 다르다”고 말한다. 화려함을 죽이고, 일정한 톤을 유지하는 것이 컨셉이다. 촬영, 미술 등 프로덕션을 미니멀하게 해 배우들의 연기에 집중한다. 특히 “장 피에르 멜빌 영화의 톤을 참고해” 암살을 소재로 한 차가운 누아르, 미스터리 첩보물 분위기를 연출하고자 한다. <마약왕>이 1970년대 한국의 다양한 풍경을 재연했다면, 이번엔 청와대, 중앙정보부, 안가 이 세 공간을 축으로 인물과 사건이 움직인다. 더불어 암살사건의 배경이 되는 워싱턴과 파리의 1970년대 모습을 재연한 점도 기대할 만한 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