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부천영화제 ‘부천 초이스: 장편 부문’ 작품상은 <더 룸>에 돌아갔다. 영화제 초반부터 입소문을 타고 일찌감치 화제작으로 떠올랐던 작품이다. <더 룸>은 원하는 것은 모두 가져다주는 마법의 방이 견인한 파국을 다룬 미스터리물이다. 매트와 케이트 부부는 수십년 전 이 집에서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고 전해 들은 후에도 물욕을 제어하지 못한다. 아기를 갖지 못해 힘들어하던 부부가 급기야 방에서 자식을 얻은 후 치닫는 파격적인 스토리는 <더 룸>이 아이디어 하나로 승부하는 장르영화가 아님을, 훨씬 거대한 야심을 품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떻게 시작된 프로젝트인가.
=프랑스에는 도시를 떠나 한적한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판타지가 있다. 실제로 낙향을 결심한 친구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더니, 사람이 살짝 미쳐 있더라. (웃음) 소비 지향적인 도시인이 조용한 변두리 삶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본래의 자기 모습을 바꾸기 쉽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 이 작품을 떠올리게 됐다.
-영화 초·중반 부부의 판타지를 시각화한 시퀀스가 인상적이었다.
=돈과 명예, 섹스를 모두 가지려고 하는 인간의 단순한 욕망을 보여준 것이다. <더 룸>은 옷장 속의 몬스터나 외부의 공격에 관한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있는 괴물을 만나는 이야기다. 지금 사람들의 욕망은 무한에 가깝다. 경계 없는 욕구가 우리를 파괴하고 있다는 점을 경고하고 싶었다. 사실 <더 룸>은 실제 일어난 일이라기보다는 어떤 이의 상상에 가까운 이야기 아닌가. 누군가의 머릿속에서는 새로운 도시도 만들 수 있다. 원래 시나리오에는 수영장이나 돌고래도 등장했는데, 그것을 모두 구현할 만큼의 제작비는 없어서 “어린아이라면 용도 만들겠다”는 대사로 대신한 신이 있었다. 제작비가 더 있었다면 좀더 다양한 그림을 만들 수 있었겠지만 주인공이 가진 판타지를 너무 많이 제시하면 영화가 자칫 지루해질 수도 있다.
-무엇이든 만들어내는 방은 미스터리하게 뒤엉킨 전기 배선과 연결돼 있다. 이 기괴한 비주얼에 영감을 준 것이 있나.
=니콜라 테슬라의 머릿속이 어떨까 상상했다. 어떤 이는 그가 미치광이라고 생각하지만 기본적으로 대단한 천재 아닌가. 복잡하게 엉킨 전깃줄이 사람의 뇌신경처럼 보이는 것을 의도해 디자인했다. 기본적으로 이 방은 무엇이든 검색하면 금방 보여주는 인터넷 같은 공간이다. 도메인 자체를 사물화하는 태세를 상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인간의 삶이나 사랑은 오브제가 아니고, 실제 인생에는 저항이 있을 수 있는데, 뭐든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고들 생각한다.
-방이 가져다준 아이 셰인은 점점 부모에게 반항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엄마인 케이트와 아들인 셰인의 관계 묘사도 흥미로웠다.
=전세계적으로 비슷하지 않을까 싶은데, 엄마들은 유독 아들을 신처럼 생각하며 모든 것을 다 투영하려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의 어느 뇌과학자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여성은 좀더 상대를 위한 일을 하려 하고 남성은 자기중심적인 경향이 있는데, 그것이 어머니의 양육 방식과 연관이 있다더라. 어쨌든 엄마든 아빠든 부모의 욕심이 자식에게까지 이어지고 그들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일종의 정신적 감옥에 가두려고 한다. 아이는 나이를 먹을수록 부모를 부정하고 이들을 떠나려고 한다. “신을 죽이면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 영화 속 설정은 자식의 독립을 상징적인 살인으로 은유한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그들만을 위한 공간이 필요하다.
-<Wine, Women and Song> <The Blue Danube Waltz> 같은 웅장한 클래식부터 <Light Me Up Twice> 같은 레트로풍의 프랑스 가곡, 음산한 톤으로 작곡된 오리지널 스코어 등 극의 전개에 발맞춘 다양한 음악 활용이 돋보인다.
=영화에 삽입된 프랑스 가곡들은 원래 저작권료가 상당히 비싼 걸로 안다. 우리 영화에 대해 잘 설명하며 곡 사용을 요청한 결과, 나름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에 쓸 수 있었다. 오리지널 스코어는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실제 악기음, 가령 첼로 소리를 섞어 이질적으로 만들었지만 전체적으로는 미니멀하게 가는 게 컨셉이었다. 부부가 우주복을 입고 등장하는 신에서 <The Blue Danube Waltz>를 깐 것은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에 대한 오마주였다.
-차기작은.
=찰리 채플린의 <키드>(1921)를 애니메이션화한 SF 장편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키드>가 나온 지 100주년 되는 2021년에 맞춰 공개할 예정이다. 프랑스·미국·룩셈부르크 공동제작으로, 필름네이션에서 판매하고 있다. 나의 첫 번째 영화 <르네상스>(2006)도 애니메이션이었고 제작하기까지 7년이 걸렸는데, 2년 만에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들려고 하니 너무 힘들다. (웃음) 그외에는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내면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각본도 쓰고 있는데,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 시리즈 같은 느낌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