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뜨겁고도 차가운, 성장의 장력
2021-06-09
글 : 김소미
10대 여성의 자립을 그리는 주목할 만한 중국 독립영화
사진제공 싸이더스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은 엄마를 죽인 소년범에게 복수하려는 한 소녀의 이야기로, 미성년의 치열한 성장담과 동시대 중국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일상사를 엿볼 수 있는 독립영화다. 지난해 제22회 서울국제영화제가 주순 감독에게 감독상을, 제23회 상하이국제영화제가 배우 등은희에게 신인여우상을 안겼다. 누구에게나 한번쯤 아로새겨진 열병의 계절, 그 여름 한철 동안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에 취해 배회하는 소녀의 모습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잔상으로 남아 일렁인다. 데뷔작을 만든 주순 감독, 떠오르는 신인배우 등은희의 인터뷰와 함께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에 담긴 사춘기 시절의 방황과 서정을 전한다.

사진제공 싸이더스

무엇이든 빠르게 흡수하고 적응하는 미성년의 특권은 절망 앞에서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자기 몫의 불행에 어느새 체념한 것처럼 자허(등은희)의 얼굴은 늘 딱딱하게 굳어 있다. 평범했던 삶은 3년 전 자허의 엄마가 살해당한 후 주저앉았다. 레슬링 선수였던 자허의 아빠는 생계를 위해 배달과 도축업에 뛰어들면서 밤마다 술을 찾고, 동급생들은 “악취가 난다”라며 자허를 따돌린다. 14살 생일을 앞둔 어느 여름날, 엄마를 죽인 소년범 유레이(이감)가 조기 석방된 사실을 알게 된 자허의 마음은 싸늘하게 얼어붙어버린다. 증오와 복수심에 압도당한 소녀가 뜻밖의 이해와 용서를 배우기까지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은 사춘기 소녀의 내면이 고통스럽게 재편되는 과정을 유려한 시선으로 스케치해나간다.

극단을 오가는 소녀의 내면

주순 감독은 실제 사연에서 영감을 얻었다. 중국에서 어느 중년 여성이 묻지마 폭행을 당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나 범인이 정신질환자라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사건이 있었다. 피해 여성의 딸이 온라인 사이트에 댓글을 쓰면서 사건이 알려졌고, 이후 가족들은 엄청난 치료비를 스스로 부담하고 빚을 갚아나가야 하는 상황이 됐다. 당시 온라인상의 누군가가 14살 미만은 법적인 처벌을 받을 수 없다고 일러주자 소녀는 한동안 가해자를 미행하면서 그에게 휘발유를 뿌리려 시도했으나 결국 아무 일도 저지르지 않았다는 결말이다.

보통 사람들의 비극이란 것이 대개 이런 형태다. 밖에서 보자면 결국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한 사람의 내면에는 기록적인 폭풍우가 휩쓸고 지나가 흔적을 남긴다. 어떤 것은 형체도 없이 떠내려가고 또 어떤 것은 굳건히 남은 채로 조용히 새 삶이 시작된다. “마음 깊숙이 얼마나 깊은 고민을 했을까, 그리고 무엇이 소녀를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게 했을까”를 생각하며 주순 감독은 이름 모를 소녀를 위해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의 시나리오를 썼다.

영화의 초반부, 자허가 수영장에 들어가자 학급 아이들이 모두 입수를 거부하는 장면이 있다. 자허가 더러운 존재인 양, 나아가 깨끗한 물까지 더럽히고 말리라는 양, 아이들은 자허에게 오염의 두려움을 드러낸다. 표면적으로는 자허가 도축업자의 딸이기 때문이겠지만 기구한 사연 곁에 머무르기를 꺼려하는 인간의 본능이 13살 남짓한 아이들에게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슬픔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도망간 타인들에게 자허는 양동이 가득 받은 붉은 물감을 뿌리고 도망쳐나온다. 푸른 수영장에 튄 검붉은 핏물같이, 엄마의 죽음이라는 느닷없는 불행에 오염된 소녀는 자신을 어떻게 정화해야만 할까.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은 성장의 동력을 상실감과 복수심으로 설정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타락이 아닌 정화의 과정으로 인물을 데리고 간다. 자허는 가해자 유레이에게서 자신을 향한 남다른 진심을 느낀 후, 복수심만큼이나 강렬한 자기 안의 믿음을 따라보기로 한다. 그의 선함을 알아본 자허가 감정이 아닌 이성을 다듬어가는 과정은 꽤나 미덥게 다가온다. 게으른 성장영화가 서사적 파국을 위해 인물의 실수나 결함을 극단까지 몰아붙이곤 하는 데 반해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은 청소년을 미성숙한 통제 불능의 존재로 바라보는 대상화를 경계하고 있다. 일탈하거나 망가뜨리고 싶은 자신과 성찰하는 자신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는 인물의 시간이야말로 성장영화가 엿보아야 할 중요한 틈새다. 이처럼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은 제목이 품은 대비만큼 극단을 오가는 내면의 에너지를 팽팽하게 조율하며 성장의 장력에 맞선다.

복수심을 끊어낸다는 뜻은

사진제공 싸이더스

인물의 심리는 화면의 빛깔로 고스란히 새어나온다. 저개발 지역 뒷골목의 리얼리티에 살인과 복수를 다루는 범죄 장르의 모티브를 입힌 영화지만, 육중한 현실의 기둥만큼이나 찬란한 기억의 기둥 또한 굳건히 버티고 서 있다. 주순 감독은 시나리오 단계부터 “자허가 엄마를 생각하는 장면은 반짝반짝 빛이 부서지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썼을 정도로 자허와 엄마가 함께했던 순간들을 아름답게 재현해 몽타주의 주재료로 활용했다. 도축장의 피와 도시의 붉은 네온사인, 자허의 빨간 책가방처럼 현실은 주로 불길한 어둠과 붉은빛으로 묘사되고 기억은 자연광을 극대화해 밝고 서정적으로 꾸렸다. 힘겨운 성장통은 그렇게 시각을 넘어 감촉으로 와닿는다.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의 오프닝 신은 영화 전체를 감싸는 흑백의 시(詩)처럼 기능한다. 자허의 차분한 내레이션과 함께 도살장에 갇힌 소들의 모습이 행갈이를 하듯 이어지는 장면이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의 끈에 묶인 소와 소녀를 오버랩시키는 이 대목은 흑백으로 화면을 꾹꾹 눌러담았음에도 바깥에 자리한 세상의 폭력과 슬픔을 선연히 감지시킨다.

청소년 범죄, 학교 폭력 등 10대 사회의 암부를 다룬 영화가 최근 중국영화계에 자주 등장하는 가운데, <그 여름, 가장 차가웠던>은 어른의 부재 속에 순수를 시험당하는 소녀의 위기를 조용하지만 끈질긴 집중력으로 짚어냈다. 홀로 이뤄낸 성장이 여전히 외롭고 위태로워 보일지라도, 자신을 묶은 복수심의 줄을 끊어낸 소녀가 유달리 홀가분한 표정을 짓는 마지막 순간을 긍정하고 싶어진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사진제공 싸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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