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책이되 영화책이 아니다. <우연히, 웨스 앤더슨>의 부제는 ‘그와 함께 여행하면 온 세상이 영화가 된다’로, 웨스 앤더슨 감독의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실제 장소의 사진을 모은 사진집이다. 책의 저자인 월리 코발은 2017년 인스타그램에 ‘우연히 웨스 앤더슨’이라는 뜻의 @AccidentallyWesAnderson 커뮤니티를 개설했다. 그 뒤 전세계에서 140만명 넘는 이들이 자신이 발견한 ‘웨스 앤더슨 같은 공간’의 사진을 보냈다는 것이 이 책의 시작이다.
웨스 앤더슨 영화에서 튀어나온 듯하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문라이즈 킹덤> <로얄 테넌바움>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같은 웨스 앤더슨의 영화는 캐릭터의 내면을 현학적이면서도 적확하게 표현한 듯한 의상과 세트 등 미술적 요소로 이름이 높다. 특히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파스텔 톤으로 알록달록한 화면이 주는, 화면만 봐도 단내가 훅 끼쳐오는 듯한 영상으로 이름 높았다. 호텔 전경부터 건물 내부 구석구석까지, 어찌나 때타지 않은 핑크와 민트색이 주조를 이루는지, 이것이야말로 다 ‘세트’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경지로 보인다. 그런데 영화 같은 공간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그것도 전세계에? 심지어 북한에도? 그런 놀라움과 즐거움을 안기는 책이 <우연히, 웨스 앤더슨>이다.
<우연히, 웨스 앤더슨>에 실린 ‘웨스 앤더슨풍 비주얼’은 비단 파스텔 톤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책에는 200여곳이 실렸는데, 표지에 실린 설산을 깎아 만든 구불구불한 도로의 급회전 구간(U자형 도로의 움푹 팬 곳)에 세워진 스위스 벨베데레 호텔부터가 그렇다. 1882년에 지어져 한때 론 빙하와 인공 동굴을 객실에서 볼 수 있었다는 이 호텔은, 오래됐고, 견고하며, 위치 때문에 약간은 엉뚱한 인상을 주며(누가 도로 한복판에 호텔을 짓는단 말인가?), 클래식한 타이포그래피로 전면이 장식돼 있다. 책 내부에는 기기묘묘한 사진들이 즐비하다. 사진집이라 그만큼 공들여 사진을 찍어 실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사진은 아무리 봐도 그림 같다.
예컨대 콜만스코프는 나미비아 남부의 유령도시다. 1908년, 콜만스코프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독일이 광부를 파견했고, 독일 소도시풍의 건물이 연이어 지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다이아몬드가 고갈되자 1956년에 도시는 완전한 폐허로 남았다. 이 지역은 지금 관광지가 되었는데, 서유럽식 건물이 버려진 채로, 집의 문이 열린 사이로 모래가 한가득 물결치듯 밀려들어 있다. 이 모래들이 열린 문틈 사이로 이동한다고.
웨스 앤더슨이 이 책을 보고 가장 가보고 싶다고 말한 곳은 크로아티아 크르카 국립공원에 있는 팬케이크 판매대다. 비오는 날, 문 닫힌 목재 팬케이크 스탠드는 길에 놓인 나무 상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녹빛이 감도는 민트색 ‘PANCAKES’라는 글씨가 ‘웨스 앤더슨 모멘트’다. 뭐라고 설명할 순 없지만 보면 알겠는 느낌.
영화와 관련해 언급할 만한 공간도 있다. 미국 뉴욕의 그래머시 타자기 회사 사진. 대공황기이던 1932년에 세운 타자기 회사는 개인정보 유출을 걱정할 필요가 없는 보안을 자랑하며 아직 영업 중이다. 이 가게에 대한 설명 중 가장 대단한 건, 주인인 폴 슈바이처가 60년간의 경험으로 손님에게 딱 맞는 타자기를 짝지어준다는 것이다. 이 가게의 단골손님은 톰 행크스인데, 그래머시 타자기 회사는 그가 출연한 영화 <더 포스트> 촬영 당시 25대의 타자기를 제공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출연자들에게 타자로 친 쪽지와 함께 타자기를 선물했다고. 미국 캘리포니아의 허스트 캐슬은 ‘성’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놀랍지 않게도 으리으리한 성과 같은 내부로 유명한데, 미디어 재벌이 소유한 이 휴가용 저택 내부는 <해리 포터>의 세트 디자이너들이 호그와트성 디자인에 참고했다고 한다.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볼수록 웨스 앤더슨적인 이미지가 무엇일지 더생각하게 된다. 많은 경우 좌우대칭이 정교하게 들어맞는 건물이나 건물의 일부를 보여주어야 하고, 좌우대칭을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는 ‘프레임’ 안의 이미지로 제시되어야 한다. 사진 속 인물은 작을수록 좋은데, 사실 없는 편이 낫다는 점이 ‘진짜’ 웨스 앤더슨 영화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리라. 색의 조합은 무엇보다 중요하지만 오래돼 바랜 듯한 파스텔 톤이 주는, 햇빛에 풍화된 느낌이라면 가장 좋다. 원색에 가까운 컬러가 제시된다면 배경의 자연 풍경이 주는 무심함과 매치되어야 한다. 비대칭이 허용되는 것은 배경의 자연 정도. 몇십년 전 자주 쓰이던 타이포그래피가 큰 역할을 할 때도 많다. 책 속 사진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다가 웨스 앤더슨의 영화들을 떠올려보니, 해석이 참 폭넓다.
목차는 지역별로 되어 있다. 미국&캐나다, 라틴아메리카, 중부 유럽&서유럽, 영국&북유럽, 남유럽&동유럽, 중동&아프리카, 남아시아&중앙아시아, 동아시아, 오세아니아, 남극 순인데, 목차만 봐도 웨스 앤더슨풍의 이미지라는 것 자체가 유럽과 미 대륙의 이미지를 주로 일컫는다는 사실을, 또한 계정에 사진을 보내는 이들이 주로 살고 여행하는 지역이 어디인지를 알 수 있다. 또한, 이 책의 장소들이 웨스 앤더슨 출생 전부터 지닌 미감이 ‘웨스 앤더슨풍’의 오리지널일지도 모른다. 북한의 평양 지하철역이 소개되어 있으며, 한국의 장소는 없다.
하지만 웨스 앤더슨 영화를 보고 만든 웨스 앤더슨식 공간은 없다. ‘우연히’가 아니니까. 참고로, <씨네21>에서는 세트 같았지만 실제 로케이션 촬영이었던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멘델스 빵집(실제로는 독일 드레스덴에 있는 푼트 형제의 유제품 가게)에 대한 기사를 실은 적이 있다. 궁금한 분들은 <씨네21> 사이트에서 검색해보시길.
“이제 나는 우연히 나 자신이 된다는 것이 어떤 건지 이해한다. 의도적으로 내가 된다는 것이 어떤 건지는 여전히 혼란스럽고, 과연 그것이 나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웨스 앤더슨의 짧지만 의미심장한 서문은 이 책의 백미다. 웨스 앤더슨이든 아니든 어쩌면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 아름다운 것이 있다. 세계 곳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