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키키 키린의 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배우 키키 키린의 대화
2021-06-17
글 : 김성훈
사진 : 최성열

<키키 키린의 말>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배우 키키 키린의 대화를 담은 책이다. 지난 2018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키키 키린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영화의 단골 출연배우였다. <걸어도 걸어도>(2008)를 시작으로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2011),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2013),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 <태풍이 지나가고>(2016), 그리고 유작인 <어느 가족>까지 고레에다 감독이 연출한 6편의 영화에 출연해 주인공의 어머니와 할머니를 연기했다.

출연 비중이 크진 않지만, 이야기에 리얼리티를 불어넣는 세심한 일상 연기 덕분에 그의 존재감은 보이는 것 이상으로 컸다. 키키 키린과 함께 작업했던 지난 10년 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잡지 <스위치>를 통해 키키 키린과 여섯 차례 긴 인터뷰를 했다. <키키 키린의 말>은 <스위치>의 인터뷰를 포함해 지면 분량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편집된 내용,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새로 쓴 인터뷰 후기까지 한데 모은 것이다.

구제 데루히코, 스즈키 세이준, 이치가와 곤,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상일, 가와세 나오미 등 많은 일본 감독이 키키 키린을 찾는 이유가 무엇일까. ‘인터뷰어’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인터뷰이’ 키키 키린의 대화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할 만하다. 인터뷰어로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키키 키린의 전작 속 특정 장면을 상세히 기억할 만큼 성실하고, 배우의 아주 작은 동작까지 포착할 만큼 눈이 예리하다.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감독 마쓰오카 조지, 2017)에서 오다기리 조와 그의 어머니인 키키 키린이 소면을 함께 먹는 장면을 두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키린씨가 소면을 먹는 방식이 좋아요. 대사도 있으니 웬만해선 그만큼 못 먹죠. 키린씨는 먹는 양이 엄청 많죠. 키린씨는 먹으면서 말하는 연기를 아주 잘하시죠?”라고 감탄했다. 키키 키린은 “연기를 하면서 동시에 실제로 먹어나가는 것.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안 하면 거짓말이 되거든”이라고 대답한다.

그의 말대로 영화 속 키키 키린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 <걸어도 걸어도>의 부엌 시퀀스에서 키키 키린이 연기한 도시코는 남편(하라다 요시오)이 욕실에서 나오는 소리를 듣고 료타에게 손자와 함께 목욕을 하라고 권유하고,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고서는 며느리(나츠가와 유이)를 부르며 일어선 뒤 남편 욕을 하면서 컵에 물을 따르고, 찬장에서 남편의 약을 꺼내 쟁반에 담는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하는 모습이 정말로 엄마 같아요. 가장 무거운 대사를 한 뒤에 훌쩍 일상으로 돌아와, 엄마의 동작과 감정이 두둥실 움직이기 시작하죠”라고 감탄한다. 키키 키린은 “배우 히라 미키지로씨가 ‘<걸어도 걸어도>를 봤는데 그런 연기는 나는 못해요’라고 하더라고. 정말 기뻤지”라고 대답한다. 평범한 일상을 표현하는 일이 눈물을 왈칵 쏟는 감정 신보다 어려운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그리고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몸, 삼박자가 시나리오의 행간을 채워넣는 마법의 순간들은 많은 감독이 그에게 기대는 이유일 것이다. <걸어도 걸어도>의 시나리오를 처음 읽었을 때 키키 키린은 직접 준비한 레이스 옷깃을 자신의 의상에 덧대기로 했다. “의상이 평범한 홈드레스였는데 의사 부인 역할이다 보니 젊은 시절에 취미가 있었다거나 그런 게 없을까 싶었”고, “이틀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인 만큼 옷을 안 바꿔 입으니 레이스 옷깃을 붙여도 되겠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다. 작은 설정을 추가함으로써 인물을 더욱더 깊게 묘사한 것이다.

함께 작업한 작품 수가 늘어날수록 두 사람의 인터뷰는 점점 깊어지고 솔직해진다. 대화 주제 또한 연기에서 키키 키린의 삶으로 옮겨간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자폐증 증상이 있어 내내 입을 다물었던 일화며, 약대 진학 시험을 치르기 전달에 아버지를 따라 놀러 갔다가 부상을 입는 바람에 극단 분가쿠자로 진로를 바꾼 일화를 보면 그는 영락없이 배우가 될 운명이었다. 타카쿠라 켄, 카츠 신타로, 나카다이 타츠야, 스기무라 하루코 등 함께 호흡을 맞췄던 명배우들에 대한 평도 그답게 솔직하고, 그래서 흥미진진하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건 한국 관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TV 시절의 키키 키린에 관한 이야기였다. 키키 키린이 인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솜씨는 TV드라마에 출연하던 시절 함께했던 동료 구제 데루히코(연출가이자 프로듀서. <시간 됐어요> <데라우치 간타로 일가> <무> <무 일족> 등 여러 드라마 연출)와 무코다 구니코(각본가이자 작가이자 소설가. 대표작은 <시간 됐어요> <데라우치 칸타로 일가> <아수라처럼> 등)로부터 받은 영향이 크다.

TV 시절은 그에게 “진지하게 재밌는 걸 했던 시기”였다. “엄청난 기세로, 영문도 모르는 채 내달렸다”고 한다. “제일 재밌었던 건 배우의 마음이 따라왔을 때야. 흉내만 내선 안돼. 저 사람은 밥을 푸고, 나는 신문을 읽는다는 당연한 일상 속에서 해야 돼. 그냥 보여줄 뿐이라면 서커스가 돼버리지만, 터무니없는 일이 평소 생활 속에 있다는 것. 그런 걸 찾고 또 찾았어요.” 지금 시대를 살아가는 배우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교훈이다.

이 책의 끝은 우리도 잘 안다. 키키 키린이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영화 <어느 가족>을 주제로 한 인터뷰(6번째 목차 ‘틀니를 빼다’)다. 이 인터뷰의 마지막 대목에서 키키 키린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에게 “감독 영화에 나가는 건 이게 마지막이야”라는 작별 인사를 했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곤란한데요. (웃음) 마지막이라는 말씀 마시고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라고 애써 대답했다. 영화 인생 끝무렵에 만난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에 출연해 자신의 이름을 세계적으로 알린 명배우가 더이상 그의 영화에 출연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키키 키린이 남긴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그들의 대화가 남긴 여운이 길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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