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팀의 일원이 되는 즐거움
2021-12-01
글 : 김현수
사진 : 오계옥
<타짜> 김혜수

1990년대의 배우 김혜수는 하이틴 스타였다. 16살이란 어린 나이에 데뷔한 그녀는 <타짜>에 캐스팅 도장을 찍을 당시에 이미 연기 경력이 20년이 넘어가는 베테랑 배우였다. 그 긴 세월 동안 스타의 자리에서 결코 뒤처진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2000년대 이후의 김혜수는 배우로서 새로운 시도, 새로운 면모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타짜> 개봉 직전에 <씨네21>과 나눈 인터뷰에서 그녀는 “2000년에 들어서기 전만 하더라도 저에게 시나리오가 들어오는 건 두 가지였어요. 밝고 경쾌한 로맨틱 코미디가 70%, 그리고 나머지는 영화라고 할 수도 없는 에로물. 정말 극단적인 거죠. 딱 그거였어요.”(<씨네21> 561호, 커버 기사 ‘20년 연기 경력, 모험은 끝나지 않았다, <타짜>의 김혜수’)라고 말한 적 있다. <쓰리> <얼굴없는 미녀> <분홍신> 등 이전에는 경험한 적 없던 호러영화에도 출연해 김혜수의 새로운 얼굴, 섹시함 뒤에 감춰진 그늘진 표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김혜수는 연기에 대한 갈증을 느껴오던 와중에도 <타짜>의 정 마담은 꽤 어려운 도전이었다고 회상한다. 오랫동안 숙고한 만큼 좋은 결과도 따라주었다. 인터뷰 내내 그녀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좋았다”, 그리고 “고마웠다”였다.

<타짜>의 캐스팅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정 마담이란 인물을 연기하기 위해 출연을 결정하기까지 어떤 고민이 있었는지, 어떤 기대를 안고 시작했는지 궁금하다.

여행을 하던 도중에 캐스팅 제의 연락을 받았다. 당시 매니저였던 키이스트의 박성혜 대표가 전화해서는 “최동훈 감독이 영화 같이하자네?”라기에 누구인지 잘 모른다고 했더니, “<범죄의 재구성>을 몰라? 충무로에 천재 감독이 나타났다고 화제잖아”라고 말하는 거다. 돌아가서 시나리오를 읽었다. 전혀 모르는 화투 이야기였는데 소재만 도박이었을 뿐,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이 도드라져 보이는 이야기였다. 화투를 모르는 내가 봐도 ‘재미있네’하며 호기심이 생겼지만 걱정도 몰려왔다. 캐스팅이 완료된 주요 배우들과 함께 연기를 잘할 수 있을까, 라는. 좋은 기회였지만 출연 결정을 하기까지 고민을 했다.

완성된 영화를 처음 보던 당시의 소감은 어땠나.

깜짝 놀랐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그때 매니저한테 “우리 영화 너무 좋은 것 같아. 100만명은 들 것 같아!”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웃음)

정 마담이란 인물을 어느 인터뷰에선가 “암고양이 같은 존재다”라고 이야기한 적 있다.

집고양이보다는 길고양이에 가깝고 어떤 행동의 의도를 강하게 드러내는 듯한 모습을 가진 고양이 같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최동훈 감독과의 작업에서도 느낀 바가 많았을 것 같다.

감독을 믿고 원작을 읽지 않고 시작했는데 촬영하는 내내 현장에서 배우들의 에너지 넘치는 모습을 보면서 덜컥 걱정이 앞섰다. 지금 내가 잘 따라가고 있는 걸까? 그래서 감독님한테 몇번이고 “나 지금 잘하고 있는 거예요?”라고 물었다. 자꾸만 괜찮다고 하시는 거다. 감독님 입장에서는 내가 엄살부린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지. 그러다 정 마담이 너구리와 대화하다가 욕하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내가 욕하는 연기가 너무 어색한 거다. 그런데 감독님이 나보고 잘하고 있다면서 즉석에서 대사를 바꿔보자고 하더라. 나중에 가서야 나를 위한 배려였다는 걸 알게 됐다. 그렇게 어느 순간 현장이 편해졌다.

수많은 영화, 드라마 현장을 경험했다. 다른 현장과 비교해보면 <타짜>는 어떤 현장이었나.

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이 재미있는 현장이었다. 배우들이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몰두하고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채로 연기했던 것 같다. ‘아, 연기를 이렇게 하는 거구나’라는 깨달음도 줬다. 내 연기에 대한 스스로의 만족감과 함께 동료 배우들과의 협업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각자 자기에게 주어진 몫은 당연히 해내야 하는 거지만 내가 지금 팀원 중 한명이고 내가 속한 <타짜>팀이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처음 느끼고 배운 현장이었다. 모든 작품이 그렇겠지만 <타짜> 현장은 생경했고 그래서 좀더 특별했던 것 같다.

강혜정 외유내강 대표가 <씨네21>과 한 인터뷰에서, 최근 촬영한 류승완 감독 신작 <밀수> 촬영장에 많은 애착을 가졌다고 하던데.

<타짜> 때 현장이 재미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여기는 배우들이 다 날아다니는구나, 싶어서 초반에는 조금 어리둥절했고 ‘내가 못 따라가면 어떡하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편해졌다. <밀수> 촬영장에서는… 일을 하면서 처음 행복하다고 느꼈다. 연기는 늘 열심히 해야 하는 일이었고 벅차지만 해내야 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그렇게 현장이 좋을 수가 없었다. 사실 살면서 불행하다고 느껴본 적은 없지만 그동안은 재미있다 정도였지, 행복하다는 기분까지는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내게 그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밀수> 현장은 내가 연기를 월등하게 잘해내서 그랬다기보다는 내가 작정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마음껏 연기하게 된 현장이었다. 배우, 감독, 제작진과도 다 좋았다. 이렇게도 좋고 저렇게도 좋고. <밀수> 현장을 경험하기 전에는 내 분량 촬영이 끝나면 가급적 집에 돌아가는 편이었다. 그런데 다른 배우들이 집에 가지 않고 현장에 계속 남아 있는 거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을 보다 용이하게 해내려면 내 개인 시간은 집에서 온전하게 쉬면서 보내야 한다 생각했는데, 계속 숙소에 남아 있었던 촬영장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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