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혼이 담긴 구라
2021-12-01
글 : 임수연
사진 : 오계옥
<타짜> 백윤식

평경장은 <타짜>의 삼분의 일 지점까지만 등장하지만, 그의 톤 앤드 매너와 가르침은 극 전체를 지배한다. 최동훈 감독은 “유유자적한데 늙은 사자일까 구렁이일까 헷갈리고, 어쩌면 가장 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캐릭터를 설명한다. 첫 등장부터 “지랄하고 자빠졌네!” 라고 시니컬하게 욕을 하며 은둔고수가 주는 위압감을 무너뜨리고, 현역을 떠나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집에서 사는 처지지만 누구도 원망하지 않으며, “혼이 담긴 구라”를 예술의 경지로 자부하고 언제나 자기 자랑을 하는 귀여움까지 배어 있는 복잡다단한 인물이다. 평경장이 전하는 화투 혹은 인생의 법칙은 영화의 소제목이 되어 고니(조승우)와 아귀(김윤석)의 손모가지를 건 한판 승부까지 영향력을 뻗어나간다.

<타짜>는 파격과 연륜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작품으로 증명해나가던 백윤식이 젊고 재능 있는 감독과 시기적절하게 조우한 기획이다. <지구를 지켜라!>의 강 사장과 <범죄의 재구성>의 김 선생, <그때 그사람들>의 김 부장을 연기할 때 백윤식은 50대 후반이었다. 왕년의 꽃미남 스타 배우들이 누군가의 ‘아버지’ 역할로 배우의 챕터를 갈음할 때, 백윤식은 지구인으로 위장한 외계인이 되어 물파스로 고문을 받거나 한국은행을 터는 전설의 사기꾼이거나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에 휘말린 화제작에 출연해 독립적인 인물을 연기했다. 백윤식만의 기품과 유머, 관록과 괴짜스러움은 스크린 밖에서도 주효한 매력을 발휘하며 당시 최고의 광고 모델로 꼽히기도 했다. 현재진행형의 전성기를 누리던 백윤식은 최동훈 감독의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을 “즐겁고 완성도 높게 작업했던 현장”으로 기억하며 감독과 제작사 싸이더스를 향한 신뢰감으로 <타짜> 역시 함께하게 됐다. 그러니 백윤식 스스로도 배우 인생이 다시 구축된 변곡점으로 규정한 <타짜>의 평경장은 느닷없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캐릭터가 아니다. 포커페이스로 사람들을 웃기던 미술 선생님(<서울의 달>)의 다음 계보로 이해하는 것도 ‘백윤식학(學)’을 정리하는 데 큰 구멍이 있다. 백윤식은 “TV 탤런트로 활동할 때도 작품성 있는 <TV문학관>에 많이 출연하면서 고뇌하는 지식인, 천재 예술가 등 다양한 인물을 연기했다. 괴팍한 캐릭터도 많이 있었다”며 자신이 갖고 있던 재료가 <타짜> 현장처럼 좋은 감독과 작가, 동료 배우들을 만나 발현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상대 배우와 하나의 호흡으로 곧장 가는 정공법의 연기를 믿는 그는 “평소에 배우들을 유심히 관찰했다가 발견한 것을 자기 작품에 잘 용해시키는” 영리한 감독을 만나 “특수한 직업을 가진 인물에게 리얼함과 생활감을 접목시켜” 표현해낼 수 있었다. 원작 만화의 근엄한 얼굴에 클래식한 고전영화를 연상케 하는 멋을 더하고, “경상도의 짝귀, 전라도의 아귀, 기카고 전국적으로 나”라고 능청스럽게 말하는 유머를 가미한 평경장의 재해석은 그렇게 탄생했다. 특히 군산에 있는 일본식 고급 목조 주택에서 촬영한 평경장 집 장면들은 배우에게도 남다른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수라 발발바, 아수라 발발바!”, “돈을 벌고 싶니? 부자가 되고 싶니?” 같은 재치 있는 대사를 영화 속 모습과 똑같이 재현하다 껄껄 웃는 배우의 표정에 장난기가 서려 있다.

백윤식은 <타짜> 때나 지금이나 강압의 카리스마 대신 여유를, 관성보다 노력을 믿는다. <타짜>에서 평경장이 손 뒤에 숨긴 화투장 한장을 쓱 보여주는 신은 CG가 아니라 백윤식이 손에 피가 나도록 연습해서 얻어낸 결과물이다. <타짜> 재개봉을 기념해 진행된 <씨네21> 화보 촬영 현장에서 백윤식은 당시 이야기를 꺼내며 분위기를 유쾌하게 전환했다. “내 손에서 피가 흐르자 먼 곳에서 모니터를 보던 최동훈 감독이 헐레벌떡 뛰어와 ‘이런 그림을 담아야 한다’고 하더라고!” 최근 촬영을 마친 <노량: 죽음의 바다>에서는 왜의 장군 시마즈 역을 연기한다. 주변에서 “대사가 너무 많다”며 신경 썼지만, 부단한 일본어 레슨을 받으며 작품을 준비한 백윤식은 “하니까 또 된다”며 씩 웃었다. “배우가 작품을 오케이했으면 다 던져야지.” 백윤식이라는 클래식이 시대를 관통해 유효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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