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아귀를 데리고 춤 한번 추겠다, 라는 마음으로"
2021-12-01
글 : 김현수
사진 : 오계옥
<타짜> 김윤석

모두가 아귀와 악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었다. <타짜>의 세계 속 중심에는 고니가 있다. 영화는 정 마담의 목소리를 빌려 관객에게 고니의 일대기를 소개한다. 고니가 어떻게 도박판의 세계로 들어서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에서 아귀는 고니와 악연으로 얽힌 수많은 사람 중 하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고니를 둘러싼 모두가 아귀의 정체에 관해 언급하길 꺼린다. 아귀는 <타짜> 세계 속에서 전설처럼 전해지는 타짜 중 가장 존재감이 무거운 타짜였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평경장도 정 마담도 고광렬도 아귀를 무서워하거나 멀리한다. 고니가 도박판에 들어서는 순간, 그가 상대해야 할 최종 보스는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최동훈 감독은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영화 경력이 많지 않았던 배우 김윤석에게 덜컥 맡겼던 것일까. 캐스팅 당시만 해도 출연 제의를 받은 본인조차 당황했을 정도다. “내게 아귀를 맡길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아귀는 전라도 출신이라는 설정인데 나는 경상도 사투리를 쓰니까 시킨다면 짝귀를 시키지 않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지.”

최동훈 감독의 선구안은 적중했다. 2006년 추석 시즌에 개봉한 <타짜>를 보고 나온 관객 모두가 아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연휴에 고향 다녀왔더니 정말로 난리가 난 거다. 사람들이 갑자기 나를 찾고 궁금해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는 서둘러야 했다. “그때는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는데 일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다 오픈시켜 놨었다. 방문자 수가 폭증하기 시작해서 야, 이거 큰일났다. 빨리 비공개로 돌려야겠다 싶어 서둘러 차단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드라마 공개의 성공 척도가 인스타그램 팔로워 수 증가로 대체되어가고 있지만 당시 김윤석이 싸이월드를 통해 느낀 인기는 아찔할 정도였다. 이후 그와 관련한 기사의 헤드라인에는 ‘몸값 폭등’, ‘아찔한 비명’ , ’판쓸이’ 같은 표현이 꼭 붙었다. 그가 <타짜>를 두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출발점”이라고 소리 높여 말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심지어 아귀는 2시간20분에 달하는 <타짜>의 러닝타임 중에서 불과 다섯 장면밖에 등장하지 않는다. 손가락을 자를지 말지 갈등하는 고니와 화장실에서 처음 마주치는 아귀의 첫 등장은 영화가 시작한 지 50여분이 지난 뒤에 나온다. “아귀를 데리고 춤 한번 추겠다, 라는 마음으로” 카메라 앞에 선 그의 몸놀림 덕분에 아귀만의 독특한 음색과 걸음걸이가 만들어졌다. “이번에는 나 한번 춤추면서 놀아볼래, 이런 느낌으로 옷을 걸쳤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걸음걸이도 달라졌다. 옷을 입으니까 몸이 그렇게 움직이더라.” 다섯 장면 만에 모두를 사로잡게 된 무시무시한 존재감은 연우무대와 극단 학전 등 대학로 연극판에서 오래 활동했던 경력에서 우러나왔다. 웃지 못할 위기도 있었다. 감각적인 연기를 선보일 만반의 준비를 한 그였지만 촬영장에 들어서니 생각지도 못한 시련이 닥쳐왔던 것. “촬영장에서 제일 괴로웠던 게 있다. 사람이 아침에 연기를 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것인가. 연극할 때는 보통 해가 지고 몸이 좀 풀리고 나서 어두운 소극장에서 연기를 하는데 이게 뭐, 벌건 대낮에 카메라 다 보이고. 심지어 연극 무대는 객석 불도 꺼지니까 어두워져서 얼굴도 안 보인다. 초집중할 수 있는환경이라는 게 주어져 있던 무대를 벗어나 현장에 가니 ‘이거 집중 못했다가는 큰일 나겠다. 눈 뜨고 코 베어가도 정신 못 차리겠구나’ 중얼거렸다.” 그를 안심시킨 건 “너무 좋았던 촬영장 분위기”였다. 그런 팀워크는 “최동훈 감독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굉장한 재능이었다”.

김윤석은 지금도 <타짜>의 촬영장이 그립다. “전국을 다니면서 100여명의 인원이 촬영했으니까 100여명이 몇달 동안 수학여행을 다닌 거나 마찬가지다. 숙소 방마다 찾아다니면서 없는 돈 모아 한잔씩 마시고. 그런 현장 분위기가 돌아올 수 없는 시절인 것 같아서 너무 아쉽고 그립다.” 낭만의 시대에 만들어진 <타짜>는 그 자체로 모두의 열정이 만들어낸 낭만의 세계다. “<타짜>에는 누아르와 낭만이 있었다”고 추억하는 김윤석의 말이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스애끼야”라고 뇌까리던 아귀의 말투와 뒤섞여 오래도록 관객의 기억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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